요즘 마가복음 1장을 계속해서 보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두번째는 광야에서 40일 금식과 사단의 3가지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이때에 세례요한은 잡혀가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메시야가 아니냐고 사람들이 생각하던 세례요한은 뒤로 물러나고 진정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구약의 대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 세례요한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회개의 세례를 주며 사람들에게 메시야가 곧 오심을 전하고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요한을 따르던 자들 중에서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된 자들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섯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중략)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예수님의 세 번째 행적은 제자들을 부르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갈릴리로 넘어와 복음을 전할때 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잡이를 마치고 그물 손질을 하고 있는 어부들에게 가서 그 중의 시몬의 배를 잠시 빌어 육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배를 띄워놓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설교를 마치시고 나서 배를 빌려준 어부 시몬에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고 합니다.
이날 시몬은 밤부터 아침까지 그물을 수도 없이 던졌지만 한마리도 잡지 못해 일을 접고 그물을 이미 다 정리해놓은 상태였습니다. 이제 집에 가서 다음날 작업을 위해 쉬어야하는 시간인데 예수님은 고기잡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물을 내리라 합니다.
물고기를 잡을 때 깊은 곳에는 그물을 내리지 않습니다. 깊은 곳에선 물고기들이 잡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어부들에게 있어서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 상식에 어긋난 것을 하라고 하는 상황에 시몬은 이렇게 답합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내가 밤이 새도록 고기잡이에 허탕 쳤고, 당신의 말은 내 상식에 맞지 않으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다.
저는 엄청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서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내가 계획한 모든 것들이 틀어졌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는 마음의 감동은 내가 살아가던 세상의 상식에 맞지 않은 것인데 내가 순종해서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보통은 하나님 이건 안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안돼요. 그건 제가 기도한거랑 다릅니다. 이렇게 반응합니다.
시몬도 해서 물고기를 잡을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행동으로 옮깁니다. 이것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자신의 상식과 생각을 믿은 것이 아니라 방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그 예수님의 말을 믿고 행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무슨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눅5:6-7-
상식에 어긋난 순종의 결과는 다른 배를 불러서 도와달라고 했으나 두 배가 잠길만큼의 고기가 잡힘입니다.
육지로 올라온 시몬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명대사가 나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막1:16-
그 말을 들은 시몬과 몇몇 어부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 말씀을 잘못 받아들이면 마음이 힘들어집니다.
갑자기 나도 기도응답 받고 모든 걸 다 버려두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착각을 하기 딱 좋으나 말씀에 나오는 시몬과 야고보 같은 사람들이 살던 이스라엘의 상황은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했던 것들이 있습니다.
헬라에 이어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고, 왕으로 세워진 사람 헤롯은 원래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두메 사람으로 하스몬 왕가를 배신하고 로마를 등에 없고 왕이 된 자이며, 종교 지도자들은 로마에 빌붙어서 서로 대제사장이 되겠다고 세를 걷어서 로마장군에게 뇌물로 바치고 있고 세례요한과 같은 이가 나타나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주던 시기입니다. 유대인에게 하나님은 언제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인지가 더 중요한 시기 였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긴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의 불행한 인생이나 자신의 앞으로의 일을 묻지 않고, 어디서 예배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인가 묻는 질문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시몬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시몬은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첫 부르심 이후 시몬이 아니라 베드로라 불리던 이 사람은 3년 후 다시 시몬이라 불리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에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사람들 앞에서 닭이 2번 울기 전에 스스로 예수님을 3번 부인하고 이름을 저주하는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목격하고 스스로 예수님 앞에 다시 설 자격이 없다 생각하여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 어부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첫 부르심에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뭐라고 고백했었나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눅5:8-
스스로 죄인이라 고백했었던 베드로는 이번에는 스스로 예수님 곁을 떠나 본래 고기잡이 어부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21:3-
갈릴리바다 어부로 돌아간 시몬은 3년전 예수님이 처음 시몬을 부르셨던 날처럼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 3년전처럼 다시 말합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요21:6-
2천년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배가 크면 얼마나 크다고, 왼쪽으로 던지던 오른편으로 던지던 무엇이 다를까요?
바보같은 말이죠, 바보같은 말인데 그 말을 듣고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가 없었다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물고기의 숫자는 153마리라고 숫자까지 성경은 기록합니다.
153 숫자는 모나미 볼펜에 적힌 숫자로도 유명하지만, 기독교에서 중요한 숫자입니다.
성경에서 그물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물을 백성들을 취하고 보호하는 선한 수단으로 상징됩니다.
그물은 예수님의 첫 제자들의 직업과 사도직과 관련이 되어 있고, 물고기를 잡던 그물은 사람을 구원으로 건져내는 영적인 그물로 바뀌어 있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마13:47-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그물에 빗대어 표현합니다. 그물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사역 자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공통된 이미지는 사람을 낚는 영적 어부입니다.
2세기 말 이후 세례는 낚시 바늘과 그물에 의한 물고기 이미지로 표현되어 왔습니다.
어부는 세례자이고, 물고기는 세례받는 자를 상징합니다.
물고기를 뜻하는 헬라어 '익투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이다. 라는 신앙고백의 첫 머리글자의 모음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시몬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는 누구라 하느냐
시몬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태복음 16장 13-16절-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 153마리는 베드로의 고백과 이어져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153이라는 숫자를 다양하게 이해하였는데,
이 말씀을 처음 듣는 유대인에게 153은 번제단은 연상하게 합니다. 번제단은 3개의 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첫번쨰 단부터 각각 그 높이가 1규빗, 5규빗, 3규빗입니다. 그리고 1의 세제곱 + 5의 세제곱 + 3의 세제곱의 합은 153이라는 숫자이며, 지성소는 정육면체로 되어 있기에 153이라는 숫자는 그들에게 번제단이 연상될 수 밖에 없습니다.
퀄리로스는 153을 숫자 중에 완전수 100은 가득찬 이방인으로, 50은 모일 수 있는 이스라엘의 나머지 백성, 3은 삼위일체의 영광이라고 해석합니다.그래서 세상의 모든 자들과 하나님을 상징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153은 '1+2+3+4...+17'의 합계로 이는 율법(10계명)과 은혜(7은사)를 뜻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오는 모든 사람들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또한 어떤 자들은 153이 갈릴리 호숫가에 사는 물고기 종류의 숫자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세상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초청되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엔 이런 기도문이 전해집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죽는 날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당신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내던져짐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153이라는 숫자를 통해 요한은 우리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은, 죄가 사해지고 생명을 얻고 축복을 받는 번제단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번제단 자체가 되고 진정한 생명과 축복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요한은 갈릴리 바다에서 다시 어부가 되고 그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을 기록하면서 153마리를 기록한 것은 이런 것들을 알림입니다.
숯불 앞에서,
이스라엘 베드로성당에 가면 예배당 십자가 양 옆으로 2개의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의 그림은 베드로와 예수님이 있고 사람들이 숯불 곁에 서 있고 닭이 그려져 있습니다.
베드로 예수님을 3번 부인한 그날 밤을 나타내는 그림입니다.
또 다른 그림은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고 갈릴리 바다와 낚시배 그리고 숯불 옆에 있는 떡과 물고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스스로 예수님 앞에 다시 설 용기가 없어 갈릴리로 도망친 베드로가 예수님을 다시 만난 상황을 나타낸 그림입니다.
교회안에 이 두 그림이 함께 있습니다.
낚시배 위에 벗고 있던 시몬은 예수님을 보자 옷을 입고 물에 뛰어들어 헤엄쳐서 호숫가로 나옵니다.
무거워진 옷을 입고 죄인처럼 앞으로 온 시몬에게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놓고 떡과 물고기를 건냅니다.
시몬에게 지금 상황은 얼마전 자신이 부인한 그 상황 같아서 힘들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 모닥불 곁에서 예수님을 3번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에게 3번 묻습니다.
그렇게 시몬은 다시 어부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부입니다.
각자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이 세상을 향해 그물을 던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이전과 다른 것은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한 세상의 그물을 던졌다면 우리는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영적인 그물로 바뀌어야 합니다.
각자가 사는 환경은 다르고 삶의 자리 또한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모든 자들이 삶을 내려놓고 갑자기 다른 길로 가지 않습니다. 여전히 동일한 삶의 자리일지라도 삶의 모습을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만나고 넘어지고 지쳐 쓰러져 있을 때, 스스로는 부르심을 잊어버리고 부정하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또 다시 찾아와 꾸짖지 않으시고 위로하시며 다시 한번 불러주십니다. 시몬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적그물을 던지는 영적 어부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 세상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하나님은 인정하시는 그러한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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