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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목사 메세지

네 가지 밭의 비유

마태복음 ,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4가지 밭의 비유, 혹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교회를 조금이라도 다녀본 분들이라면 자주 들어본 설교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전에 나는 길가이고 돌밭이고 가시밭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변화되어서 이렇게 예배도 드리고 말씀도 나누고 기도생활도 하는 좋은땅, 옥토가 된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마음 속으로 생각합니다.


이 말씀에서 네 가지 땅으로 비유되는 사람들중에서 오직 한가지로 비유되는 사람만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는 흔히 복음을 들은 사람은 구원을 받고,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비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구원을 받은 사람이나 받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 똑같은 참된 복음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이 비유에서 복음을 아예 듣지 못한 사람은 애초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복음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 세 부류의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오직 한 부류의 사람만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듣는 복음이 성경적인지, 참된 복음인지도 중요하지만 듣는자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듣고 있는지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적인 교회에서 참된 복음을 듣고 있어도 길가, 돌밭,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듣고 있다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3가지 밭에 해당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막6:20)


헤롯왕은 세례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을 여겼으며, 그를 두려워하고 보호했고, 그의 말을 들을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여러 영어 번역본에서는 헤롯이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많은 일을 행했다고도 기록합니다. 그러나 결국에 그는 자기의 체면과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세례 요한을 사형시킵니다.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막6:26)
 

로마의 총독 벨릭스 또한 사도바울에게 2년 동안 자주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얼마의 돈을 받기를 원했으며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려고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성경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성경 교사이면서 신약의 절반 이상을 기록한 사도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행24:25-26)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헤롯과 벨릭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진짜 복음을, 오랜시간동안, 자원하는 마음으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헤롯은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많은 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만약 지금 현실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믿음이 좋은 참 그리스도인이라 칭할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 이유는 동일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평가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서도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말이나 시선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좀 더 깊게 들어가면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자기 자신을 더 생각하고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이 더 우선한 자기 의가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길가에 뿌려진 씨' 같은사람입니다.
씨앗이 안으로 뿌리내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게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면서 하나님께로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꼐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44)
 

우리는 속으로 '나는 절대로 헤롯왕이나 벨릭스 총독같은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람들의 시선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게 생각해! 나는 주변사람들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아 내 삶에는 이런 저런 원칙이 있고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는 내가 생각하고 결정하는 사람이야."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변인 부모 형제 친구 동료 보다 때로는 나 자신이 더 방해하기도 합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데 스스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올무를 만들어 자기 자신의 기준을 세워놓고 이게 하나님을 믿는 나의 믿음이야 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지극히 세상적인 사상과 가치관들이 조합된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모 형제 친구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미워해야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다고 합니다. 

"허다한 무리가 함꼐 갈새 예수꼐서 돌이키사...“


예수님을 따르는 허다한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가고 있고 구원에 이른다고 여길 것이나 예수님은 그들은 자기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이나 주변인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갈1:10)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았다고 구원을 얻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놀라고 기쁨을 경험했다고 해서 그긋이 구원의 경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단 중에 어떤 이단은 이렇게 믿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냐고, 언제 몇월 며칠에 구원에 이르렀냐 그것을 모르면 구원받은게 아니라고 하면서 속입니다.


구원은 어떤날 복음을 듣고 기쁨과 평안을 경험했다해서 구원을 확정지을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스스로 자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의 삶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의 삶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면, 세상과 같은 즐거움을 좋아하고 세상이 추구하는 바를 추구한다면,

여전히 남을 속이고 기만하고 이용하고 거짓을 말한다면그것은 가짜입니다.

그러면서 누군가 지적하면 나는 구원에 이르렀다 주장합니다. 구원파와 이들이 다른 점이 무엇인지 저는 찾지 못하겠습니다. 

복음을 듣고 아무리 강렬한 체험을 했다 한들 그 체험 자체가 구원의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 기쁨으로 받은 말씀이 성령의 열매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생생하게 기억하고 간증한다 한들 거듭난 사람이 아닐 수 있고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돌밭에 뿌려진 씨' 같은 사람입니다.
[히6:1-6]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어떤 은사를 맛보았고 성령에 참예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고 그것이 구원이 아니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애써 보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통해 합당한 열매 맺는 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은 아니라고 합니다. 

말씀을 듣고 새사람이 된 사람의 삶에는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자비와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2-23)
 
이렇게 여러가지 중에서 중요한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죄인임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고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서 살던 사람이며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사함과 거듭남과 구원이라는 것은 '죄인'에게만 유효합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는 죄사함 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도덕률과 양심의 기준에서 나는 완벽히 선한 사람은 아니니 나는 죄를 조금은 가진 죄인이라고 말하는 수준이 아니라 성경적인 기준에 있어서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를 근거로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해주십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에서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아무리 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십자가 사건으로 용서받았노라 말하더라도, 생생하게 성령의 체험을 간증한다 한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운다 한듯 그는 죄사함 받지 못할 것입니다.


흙의 깊은 곳에 씨가 떨어지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복음이 떨어지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선함과 의로움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에서 100% 완벽한 죄인의 모습으로 못박힌 자기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진정으로  인정할때에야 우리는 구원받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 깊음에 이르렀다고 고백하는 행위가 바로 세례입니다. 그래서 저는 현재 기독교는 그 중요한 세례를 잃어버렸으며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좋은 땅이 되지 못하도록 교회 안의 세례를 더럽혔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의를 세울 수 없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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