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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목사 메세지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이

크리스마스가 되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족들과 연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선물을 준비하고 나누는 그런 날입니다.꼭 교회를 다니지않아도, 아니 오히려 더 이 날을 즐기고 축하하고 기념합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교회를 공격하는 사람들 또한 많이 생겨납니다. 
성경 어디에도 12월 25일에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말이 없는데 왜 너네는 이날은 예수님의 탄생일이라고 하느냐? 이제 CHRISTMAS 라고 하지말고 HAPPY HOLIDAY 라고 부르자!

 

CHIRST를 이 날에서 뺴버리자! 하는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던 날에게 예수를 뺴버리고 우리가 즐기자!

 

우리도 이 날이 정확히 예수님이 태어난 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날은 그 날을 역사적인 날로 기억하는 날이 아니라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기뻐하는 기념일입니다. 

 

우리의 생일이 하루 이틀 차이가 난다해서 아니 혹은 몇달씩 차이가 난다해서 누군가 내 생일 아닌 날에 나의 태어난 날을 축하하고 기뻐해주는 그것이 의미 없어지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여려분들을 넘어뜨리려는 자들의 말에 속지 않길 바랍니다.

 



제주한교회 여러분, 크리스마스에는 아름다운 일이 일어납니다. 아니 아름다운 일, 가치있는 일이 일어나게 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크리스마스의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날 밤, 하나님의 러브 스토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가득했고, 예배당 뜰 가득히 무릎 위까지 차오르는 하얀 눈이 내렸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기쁨과, 사랑과, 관대함이 쌓인 눈만큼이나 풍요로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구간에 나시고, 그분의 무한하심과 전능하심이 죄로 얼룩진 인간의 역사 속에 어린 아기의 울음으로 오신 것을 묵상하는 것은 기가 막힌 일입니다. 성육신은 우주의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말 구유에 나시던 날, 하늘은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천사들은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고, 하늘의 별들이 심상치 않게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오직 사람들만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크리스마스는 ‘기다림’의 소망과 믿음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의 긴 기다림이 결실한 날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것은 기다림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생명도 기다림으로 탄생합니다. 알에서 병아리를 꺼내려면 기다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정말 어렵고 힘든 환경이지만, 때로는 미움을 당하고,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아름답고 영롱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내 인생에 맡기신 위대하고 가치있는 일을 위해 수고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다리는 자는 축복을 받습니다. 기다림이 가치있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끝까지 기대하고 기다림으로 복된 인생을 허락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크리스마스는 ‘영접하는 날’입니다.

오래전에 영국의 런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런던 교외의 한 농가를 지나던 일단의 무리들이 한 농가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집의 주인에게 우산을 하나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별 생각이 없이 자신이 쓰던 우산중에 제일 낡은 것을 하나 주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주인인듯한 한 여인에게 그 우산을 씌워주고 그 집을 떠났습니다.

다음날 어떤 사람이 아주 예쁘게 포장된 편지와 함께 그 우산을 다시 가져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감사합니다.”라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어제 우산을 빌렸던 여인의 싸인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싸인은 “엘리자베스 여왕”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농부가 얼마나 후회를 했겠습니까? “그분이 여왕인줄 알았었더라면 네가 정성을 다해서 그분을 영접했을 텐데… 그분에게 내가 가진 최고의 우산을 드렸을 텐데…”


런던 교외의 허름한 농가에서 일어난 사건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던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이 사건의 엄청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분을 만날 수 있는 특권을 상실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헤롯왕은 당시 유대를 통치하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태어나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 아기를 경배하기 보다는 자신의 왕권에 대한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는 왕의 태어나심에 대해 불안했고,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헤롯이 어떤일을 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당시 베들레헴과 그 지경에 있는 2살이하의 어린이들을 다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살육의 칼을 가지고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헤롯은 왕을 영접하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왜?

 

예수님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헤롯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나가는 것이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무엇을 빼앗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인이, 친구가 교회에 나가면 빼앗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요, 더욱 더 풍성히 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때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헤롯은 동방박사의 방문을 받고, 서기관들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놀랍게도 서기관들은 구약성경의 미가서를 인용해서 예수님의 탄생이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았고, 정확하게 예수님의 탄생 장소를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날, 베들레헴의 마구간에는 서기관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고, 모태신앙이고, 직분을 받다 보면 소위 종교적인 지식은 저절로 늘어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라는 것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이 그들의 고백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베들레헴으로 찾아갈 발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아기예수께서 말구유 위에 누이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말구유에 누우신 이유를 ‘사관에 있을 곳에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사관’은 여관을 말합니다. 그 당시 베들레헴에는 호적을 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다른 많은 손님들을 맞이하던 여관주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역사는 BC와 AD로 나누어 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거듭난 삶을 증언합니다. 우리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으신 그분, 기묘자요, 모사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전능하신 분이시요, 세상의 빛이시요, 영존하시는 예수님, 바로 그분이 지금 문밖에 서있습니다.


그런데 여관주인은 그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합니다. 왜? 먹고 사는데 바빠서 입니다. 손님들이 밀어닥치고 두둑한 팁을 받고, 금새 부자가 될 것 같은 환상 속에서 참된 복의 근원이신,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것입니다.


땀흘려 일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이 크리스마스의 계절에 이제 새해를 앞둔 이 귀한 시간을 지나면서 여러분의 우선순위에 대한 확실한 고백을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가장 슬픈 구절은 요한복음 1:11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모두가 아기예수님을 영접하는 축복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보았다>는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의 눈으로 무엇을 보게 되는 것을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본다>는 말을 이와 같이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 이해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 모르는 데서 오는 오해입니다. 우리의 눈은 육신 뒤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데 아무 도움이 안될 뿐 만이 아니라 때로는 치명적인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눈에 보이면 금방 믿고 무릎을 꿇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3년 동안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 많은 것들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고 내 환경과 사건을 통해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C.S. 루이스는 “고난은 하나님의 메가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메가폰으로 소리를 쳐도 못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지 못합니다. 육신의 눈은 멀쩡하게 떠있는데 영혼의 눈은 봉사입니다. 임박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합니다. 다른 소리는 잘 듣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귀가 먼 것입니다.


어느 생물학자가 혼잡한 런던의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화원 앞을 지나다가 귀뚜라미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그런데 길을 걷다가 동전을 떨어뜨리면 사람들은 금방 고개를 돌려 바라봅니다. 돈 소리를 듣는 귀는 개발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없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합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고 대답하십니다. 보여달라는 사람에게 믿으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반응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바른 태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합니까? 믿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머리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대하는 것, 곧 인격적인 반응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할 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문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이 문이 열리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으면 보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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