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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2024 말씀을 걷다

말씀을 걷다 창세기 27-30장

1/9/2024(화) 창세기 27-30장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 세에 낳은 아들이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기를 가질 수 없을 때 태어난 이삭은 요한의 말처럼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아들이다. 성경에서 불임 중에 태어난 아기는 그 생명이 하나님을 근거로 한다는 내용을 품고 있다.

우리는 이삭의 기록을 보며 매우 수동적이고 순종하는 아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삭은 아버지의 것을 되풀이 한다. 아버지가 파낸 우물을 다시 파고 있고, 그리고 아버지가 아비멜렉과 바로를 만난 것과 같이 자기도 같은 경험을 되풀이 하는 모습에서 동일 주제에 대한 약간의 수정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손인 야곱에 대해서도 이삭은 훗날 12지파의 아버지가 되는 야곱이 아버지로 간결하게 정리 된다. 그래서 [이삭의 아버지는 아브라함], [이삭의 아들은 야곱],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삭], [야곱의 아버지는 이삭]… 이것이 이삭의 정체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삭을 보며 [자기 절제]의 최고봉을 본다. 이런 이삭의 일생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순종]이라는 단어가 뚝 떨어진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브리서 5:8)

아브라함의 믿음의 절정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그를 데리고 모리아 산에 오르는 장면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믿음은, 그때까지 아브라함 자신과 동행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뢰였다. 이 믿음의 자리에 이삭은 묵묵히 아버지 아브라함을 따라 모리아 산에 오른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우리는 이삭을 통해서 [십자가]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모습을 보면, 야곱이 에서로 변장하여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채는 장면에서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 왔을 때 야곱에게 속은 것을 알게 되지만 축복을 무르지 않는다. 이런 이삭의 모습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주시는 복을 받을 자를 어떻게 선택하시는 지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삭 자신이 복을 주는 당사자라면 야곱이 자신을 속였음을 알았을 때 취소하고 에서에게 주면 된다. 복을 주는 자는 복을 빼앗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야곱에게 주신 축복에 대해서 이삭 자신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이런 이삭의 모습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왜 에서가 아니고 야곱인가? 에 대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라고 한다. 이 사건은 누구는 선택을 받았고 누구는 버려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에서 형제의 이야기는 중요한 내용을 품고 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에서 가인, 이스마엘, 그리고 에서는 구원이 적용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벨, 이삭, 야곱이 없으면 안된다. 구원의 조건(condition)은 오직 예수 그리스를 통해서 받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이 적용(context)된다.

[기도]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축복을 받을 것이니라. Isaac trembled violently and said, "Who was it, then, that hunted game and brought it to me? I ate it just before you came and I blessed him--and indeed he will be blessed!” (창세기 27:33)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우리가 겪는 사건과 환경보다 항상 더 크시고 권위가 있음을 우리 삶 가운데 인정하며 살겠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건과 사실에 집착하지 않고 건강한 해석을 통해서 복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