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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2024 말씀을 걷다

2024 말씀을 걷다 레위기 5-8장

레위기 5-8장

[속죄제, Sin Offering], 히브리어 하타트(חַטָּאָת)는 ‘죄’라는 뜻이다. 레위기는 구원만큼, 구속,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가시는 내용까지 품은 말씀이다. 그래서 속죄제는 우리의 죄를 씻는 [정결제]의 성격이 강하다. 속죄제는 레위기의 5가지 제사 중에서 가장 길게 쓰여져 있다. 이 내용이 긴 이유는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속죄제의 종류와 제물을 드리는 사람 그리고 속건제의 경우에는 배상에 대한 자세한 규정들이 하나님의 백성, 곧 공동체와 밀접 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앞에 나오는 제사들(1-3장)과 무엇이 다른 지를 찾아보면 발견된다.

1-3장을 제물을 중심으로 보면, 값비싼 제물에서 시작해서 가난한 자를 위해서 부담이 적은 예물로 제사를 드리는 방법을 기록했다. 그러나 4장에 속죄제는 경제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제사를 드리는 자의 지위에 따라 배열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제일 앞에 [제사장의 죄]와 [온 회중의 죄]가 나온다(레위기 4:3-21). 이 속죄제의 특징은 성소에 피가 뿌려진다. 그리고 두번째는 [족장의 죄]과 [평민의 죄]인데, 그 특징은 번제단에 피를 바른다(레위기 4:22-35). 그리고 5장에 와서는 [규례]를 기록하고 있다(레위기 5:1-13). 각각의 문단이 ‘만일’로 시작하고, 끝날 때는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혹은 유사한 문장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에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다만, 처음 제사장의 경우에, 제사장의 죄에 대해 스스로 용서를 선포할 수 없기 때문에 공통적인 끝 문장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속죄제의 많은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조건이 되는 중요한 말씀이 레위기 4:2에 나타나 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려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거든”(레위기 4:2)

[누구든지]라는 단어는 매우 포괄적인 범위를 품고 있다. 그 중에서 고의적이나 알고 짓는 죄보다 무지(without knowing) 중에 짓는 죄의 범위를 품은 것으로, 이 죄에서 벗어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하나라도]는 계명의 ‘금지명령 중에 하나라도’ 이다. 이와 같이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낸다. 무지 중의 죄도 율법 앞에서는 숨겨지지 않는다. 속죄제는 그 드러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그런데 제일 앞에 제사장의 죄가 나오고, 그 다음에 온 회중의 죄가 나온다. 상기 했듯이 속죄제는 빈부의 차이로 구분되지 않고 지위로 구분되어 있다. 그 중에서 제사장과 온 회중의 속죄제가 제일 앞에 나오는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제사장]의 죄는 단순히 자신의 부정에서 끝나지 않고 백성들에게 파급된다. 그래서 피가 성소의 가장 깊은 곳에 뿌려진다.

이어 나오는 [온 회중]도 마찬가지이다. 죄는 개인적일 뿐 만이 아니라, 민족적이고, 문화적이다. 이것은 세상의 죄와는 다릅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대부분 독일 교회는 침묵했다. 미국에서 신실 하다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흑인을 노예로 부렸다. 이런 노골적인 공동체의 죄 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 스며든 온 회중의 무지(without knowing)로 인한 죄도 있다.

그러면 이어 나오는 [족장]과 [평민]의 죄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제사장의 죄와 온 회중의 죄는 그 ‘죄의 파급력을 강조한 것’이지, 개인적인 죄의 경중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족장과 평민의 속죄제에 두가지 강조점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하나라도’ 그리고 ‘흠 없는’이다.

“만일 족장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 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레위기 4:22)

이 말씀에서 [계명 중 하나라도]를 바울은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 것’(로마서 3:21)이라고 했다. 그러면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 그러면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해 주셨다. 그리고 율법이 주어졌고, 언약이 선포되고, 성막이 완성되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성막으로 그 죄를 가지고 와서 속죄제를 드린다. 그 안에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품어져 있다. 이렇게 율법과 언약과 성전이 구약을 지탱하는 핵심 틀이다.

[평민]이 속죄제를 드릴 때, 제사의 방식은 같다. 그런데 제물이 두가지가 나와서 이목을 끌게 된다. 그것은 암염소와 어린양이며 이 두가지 제물에서 강조된 것은 ‘흠 없는’이다.

[속죄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단어는 ‘죄를 깨우친다는 것’이다. 죄를 ‘계명 앞에서’ 깨우친다. 그리고 성소로 나와 속죄제를 드린다. 우리가 말씀으로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 앞으로 나가는 원리이다. 그런데 여기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이 나온다.

“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레위기 5:7a)

이 말씀은 가난한 이를 위한 속죄 제물을 말한다. 양을 바치지 못하면 산 비둘기 두 마리나 집 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제물로 드리라고 하지? 가난하다고 드릴 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한다. 그 마음의 중심을 가지고 나와야 하며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받으신다.

[속건제, Guilt Offering]는 아샴(םꚂאָ)이다. 이 죄는 범죄, 범법, 손해 등의 뜻을 품고 있다. 전통적으로 ‘guilt’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요즘에는 배상(reparation)이라는 단어도 많이 번역된다. 하나님의 재산과 사람의 재산에 피해를 입혔을 때 드리는 제사라고 생각하면 된다. 속건(愆)제는 ‘허물 건’ 자로 벗겨내야 할 과실을 뜻한다.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레위기 6:2)

상기한 말씀이 속건제의 중심이다. 특별히 구약에서 십일조와 첫 새끼에 온전하지 못하면 그에 1/5을 더하여 바치도록 했고, 이웃에 대한 보상도 1/5를 더하여 배상하도록 했다. 이 속건제 역시 ‘값을 치룬다’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내용을 품고 있다.

정리하면, 구약의 5대 제사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이다. 이 재사를 그 방법에 따라 나누면 화제, 요제, 거제, 전제(관제)로 나누어 진다. 이 다섯 가지 제사는, 백성들이 그 제사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어떤 [내용]과 [절차]를 통해 나와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6장에서 ‘번제’가 다시 나온다. 동일 주제의 반복 같지만 레위기 6장부터는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이다. 그래서 이렇게 시작된다. ->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라”(레위기 6:9)

제사장이 번제를 집례할 때 중요한 점은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다.

“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번제물은 아침까지 제단 위에 있는 석쇠 위에 두고 제단의 불이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레위기 6:9), “제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 지니라”(레위기 6:12-13) -> 이렇게 중요함을 세번 강조하고 있다.

제사장이 제물을 태우며 불을 꺼트리지 말아야 한다는 명령은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는데, 성경에서 [불]을 어떻게 말씀하는가에 답이 있다. -> 불은 태워서 정결케 한다는 것은 [정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불이 가지는 자체의 성격은 [심판]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지옥을 ‘꺼지지 않는 불’로 설명한다. -> 그런데 이 심판은 종말론적이다. 심판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과정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해 있다. 번제 곧 불로 태워드리는 제사는 [종말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종말론적이라는 뜻이 무엇일까? 종말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는 ‘언제 올까? 어느때 올까?’로 보는 것이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때 그 때와 시기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때와 시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권한이라고 하셨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사도행전 1:7)

성경이 말씀하는 종말론적 신앙은 [목적 지향성]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통해서, 하나님이 처음 목적하신 것을 [완성]하시는 마지막 단계를 종말론적이라고 한다.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채워 나가는 것, 살아내는 것이다. 곧 종말에 대한 의식이 [오늘의 삶에 작동되게 하는 것]이다. -> 그 안에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세상의 부조리나 신자의 고난과 억울함에 대한 보상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가해자 된 실수와 연약함이 완성되는 소망이다.

“그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고 그 재를 진영 바깥 곧 정결한 곳으로 가져갈 것이요” (레위기 6:11)

번제를 집례하는 제사장은 제사를 집례할 때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어야 한다. 세마포 옷을 벗고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번제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을 예표 한다.

이상한 것은 성밖으로 불탄 재를 가지고 나갈 때 제사장은 세마포 옷을 벗고 다른 의복을 입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영문 밖에서]돌아가시는 것을 예표한다. 십자가는 골고다라는 영문 밖, 십자가에서 처형 당한 시신들을 버리는 곳에서 돌아가셨다. 제사장은 세마포 옷을 벗고 환복을 한 후에 재를 가지고 진영 밖, 곳 저주받은 갈보리(골고다)로 가야 한다(재는 죽음을 상징한다). 그런데 레위기에서는 그 저주받은 진영 밖을 ‘거룩한 곳’이라고 기록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예표했다.

레위기는 그 진영 바깥을 [정결한 곳]이라고 한다(레위기 6:11). 인간이 보기에는 영문 밖, 십자가가 세워진 골고다는 죽음과 해골의 장소지만, 성경은 그곳을 가장 ‘깨끗한 장소’라고 한다. ->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 바로 거기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상기한 1/ 과 2/의 내용을 연결하면 종말론적 신앙은 하나님의 구속의 완성이며, 이 모든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진다는 뜻이 된다.

[기도]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 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으리라 In this way the priest will make atonement for him before the LORD, and he will be forgiven for any of these things he did that made him guilty. (레위기 6: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로, 겸손히 하나님의 의를 살아내게 하시고, 천국 백성의 영광으로 은혜 안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 그리고 죄의 습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함에 대해 사탄이 참소할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확인하고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