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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2024 말씀을 걷다

말씀을 걷다 사무엘상 5-8장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있었을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오해가 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가 오늘 본문에 나타난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이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주신 땅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당연히 승리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패하게 되고 사천 명의 군사가 죽게 된다(사무엘상 4:1-2). 놀란 이스라엘은 패인을 분석하다가 실로에 있는 법궤를 모셔오자고 한다. -> 이스라엘이 패한 원인은 당연히 그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에 대한 성찰로 가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외부적인 것,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해 보이는 법궤를 가져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법궤를 모셔왔지만 다시 패배하여 삼 만명이 죽고 법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까지 죽게 된다. 이 패배로 인한 이스라엘의 신앙적 혼란은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이를 낳고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은 데서 나타난다(사무엘상 4:21). 이가봇은 ‘영광이 없다’, ‘영광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과연 그럴까?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블레셋의 도시인 아스돗에 이르렀다. 그런데 뜻 밖에도 하나님은 법궤를 빼앗아간 블레셋의 중심부, 그들의 신앙의 자리인 다곤 신당에서 일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다곤 신을 섬기는 블레셋의 제사장들이 아침에 신전에 가보니까 다곤이 법궤 앞에 엎드러져 절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곤을 다시 세워놓고 그 이튿날 가보니까 이번에는 머리가 땅에 닿아 절하듯이 법궤 앞에 있고, 손목은 잘려서 문지방에 걸려있고, 몸뚱이만 남아있는 꼴이 되어있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매우 당황하게 된다. 결국 블레셋은 견디지 못하고 7개월만에 법궤를 돌려보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가봇(하나님의 영광이 떠남)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가진 가치관, 곧 법궤의 우상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 우상은 사람이 자기 욕심을 위해 만드는 것이다. 우상의 가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만족시켜주는데 있다. 블레셋에 법궤를 빼앗기는 사건으로 하나님은 인간이 주인이고 하나님이 수단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을 드러내셨다. -> 이 패배는 하나님의 패배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패배였다.
 
한편 블레셋은 다곤 신전의 일과 다곤 신전이 있는 아스돗에 재앙이 임하는 일로 당황하여 법궤를 가드로 옮겼는데 가드에서도 재앙이 임했다. 그래서 블레셋은 법궤를 에그론으로 옮기는데 에그론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려 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이렇게 일곱달을 블레셋에 머문 법궤에 대해서, 블레셋이 법궤의 신통력을 시험해보는 장면이 사무엘상 6장이다. 젖을 먹이던 암소가 끄는 수레위에 법궤를 싣고 블레셋의 방백들이 이 암소가 이스라엘로 가면 여호와라는 신에게서 일어난 일이고, 돌아오면 그들에게 내린 재앙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테스트한다. 그때 암소는 자기 새끼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지 않고 울면서 이스라엘로 향한다. 이 사건을 통해서 블레셋은 법궤를 통한 기적들이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임을 알게 된다. 이로 인해 법궤는 이스라엘 땅 기럇여아림으로 돌아오게 된다. 원래 법궤는 실로에 있었는데, 블레셋의 명령에 의해 가지 못하고 기럇여아림에 머물게 된다(사무엘상 7: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산에 사는 아비나답 집에 법궤를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궤를 지키게 했다.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사무엘상 7:2)
 
아비나답의 집에 법궤가 20년 머무는데,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했는데 직역하면 [애통하니라] 라는 뜻이다. 그들이 애통한 것은 법궤가 아직 실로에 가지 못했기 때문으로, 블레셋의 영향아래 자유하지 못함으로 인한 것이다.
 
바로 이 때 사무엘이 등장한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 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사무엘상 7:3)
 
상기된 사무엘의 이야기를 안에서 정확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진단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다고 하지만 그들의 문화와 인식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바알과 아스다롯이다. 바알은 능력과 전쟁, 풍요의 신이다. 곧 세력과 힘, 숫자와 크기의 신이다. 그런데 바알에 접속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신이 아스다롯이다. 그래서 바알과 아스다롯에 성(性)적인 교류를 함으로 접속이 된다. 그래서 고대신당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난잡한 성적행위들이 당연히 일어났다. 그래서 고대 신당의 음란함은 전부 제의 적인 것으로 여사제들은 전부 창녀였다. 이런 타락과 바알이 주는 물질과 힘, 풍요의 가치관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요, 예배도 드리고, 헌신도 하는데, 실질적인 실존의 삶속에서, 자녀들의 양육, 직장생활, 사업 등등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선택하는 문제들 앞에서 [바알]과 [아스다롯]의 가치관을 따르고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환경이 오고, 상황이 오면,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인다. 이것을 [신앙인의 불신앙]이라고 한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사무엘상 7:4) 사무엘의 촉구로 이제 이스라엘에 빛이 비추이기 시작한다. 이 전쟁은 사무엘상 4장에서 시작된 전쟁이다. 거기부터 7장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은 언약궤에 대한 기록이다. 이 언약궤에 대한 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눈먼 신앙을 언약궤를 통해서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언약궤라는 종교형식으로 대신한 것이다. 보배가 담기면 질그릇도 존귀하다.
 
이제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모이게 한다. 미스바는 ‘파수대’라는 뜻이다. 이런 좋은 용어들을 이단인 여호와 증인이 사용하고 있지?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사무엘상 7:5-6)
 
[물을 부었다]는 애통을 상징하고, [금식]은 자기의 힘과 방법을 포기하는 것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태도이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사무엘상 7:12)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사무엘상 7:15-17)
 
다스렸으되, 다스렸고, 다스렸으며… 사무엘이 ‘다스렸다’은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먹인 것이다. 이 말씀이 죽었던 이스라엘을 살렸다.
 
[기도]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He named it Ebenezer, saying, "Thus far has the LORD helped us." (사무엘상 7:12)
 
우리의 모든 신앙의 행위에 하나님께 대한 바른 내용이 담기도록 깨어 분별하게 하옵소서. 힘, 숫자, 사람을 의지하라는 시험을 이겨내게 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않도록 신앙의 이름으로 우상을 숭배하지 않게 하옵소서. 바른 분별을 위해 말씀으로 돌아가고, 말씀과 항상 동행하며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4. 3. 11
3/13/2024(수) 사무엘상 1-4장

3/13/2024(수) 사무엘상 1-4장

사무엘상의 시대는 사사시대이다. 깊고 어두운 사사의 시대에 사무엘을 통해 답이 주어진다. 사사기와 사무엘서 중간에 있는 룻기는 그 이유를 [은혜]라고 답해준다. 사시기의 절망에서 룻기에 은혜가 부어진다. 무너진 나오미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실하신 은혜로 기초가 세워지고 나오미에게 생명이 안겨진다. 그리고 그 혈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셨다. 이어지는 사무엘서는 룻기의 나오미에서 이어진 혈통을 통해서 다윗을 준비시키는 이야기이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음이니이다” (사무엘상 2:1-2)

상기한 말씀은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하나님께 드린 기도이며 이 내용은 참으로 은혜롭고 우리가 모두 드려야 할 찬송이다. 그런데 이 찬송이 전부가 아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참으로 난해하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사무엘상 2:3)

앞에 기록된 1-2절에 이어진 3절 이기에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말라는 의미로 읽히기 쉽다. 그러나 3절을 4절와 이어보면 다르다.

“용사의 활은 꺽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사무엘상 2:4)

이 내용은 조건과 결과의 모순이다. 이 한나의 기도는 1장에서 일어난 사건에 뿌리를 둔 찬송으로, 다만 ‘자식 없는 여인이 아들을 구해서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없고’, 엘리에게는 두 아들이 제사장으로 ‘있고’,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더라.] 이것이 사무엘상의 병치구조(parallelism)이다.

한나의 기도를 잘 보자. 용사의 활은 강한데 꺽인다. 넘어진 자는 약한데 힘으로 띠를 띠게 된다. 반전이 일어나지? 이 반전에 대한 이야기는 한나가 사무엘을 낳는데 일어난 사건이다. [반전에 초점을 두고] 계속 보자.

“풍족 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서 올리기도 하시는 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 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사무엘상 2:5-8)

이 말씀을 설핏 보면 하나님이 매우 변덕스러워 보인다. 누구는 풍족하게 하고, 누구는 주리게 하시지? 누구는 아기가 없었는데 아기를 주시고 아기가 많았는데 쇠약해 지는 자는 누구지? 죽는 자는 누구고 사는 자는 누구지? 가난한 자를 부하게 하시는데 나이면 좋겠다! 이렇게 보면 이 말씀을 오해한 것이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반전]에 초점을 두고 보면 다른 내용이 보이실 것이다.

한나의 기도 찬송은 사사기의 어두운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새벽 같은 고백이 된다. 때는 사사시대이다. 가장 깊고 어두운 사사 시대에 우리가 알고 붙잡혀 있는 인과율이 깨어지고 거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의 성격이 한나의 기도 찬송을 통해 드려지는 것이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이 사무엘을 통해서 브엘스바에서 단까지 사무엘의 말씀이 전해지고 가르쳐지면서 잿더미 속에 있던 이스라엘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한나의 이야기는 ‘자식 없는 여인이 아들을 구해서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없고’, 엘리에게는 두 아들이 제사장으로 ‘있고’,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더라]   이것이 사무엘상의 병치구조(parallelism)이다.

[기도]

그가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He will guard the feet of his saints, (사무엘상 2:9)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이 온 세상의 인과율이 깨어진 가장 큰 기적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그렇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먹고, 걸으며 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