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7장에서 갑작스런 엘리야의 등장은 우리에게 어떤 극적인 기대를 가지게 한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보이는 엘리야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 쪽에서 보면 역사를 방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개입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시다.
엘리야를 부르신 하나님은 그를 먼저 숨기신다(열왕기상 17:3). 그가 숨어 있다는 것은 그가 아직 어떤 일을 하지 않은 상태로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이 엘리야를 숨기신 것도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하심은 항상 계속되고 있음을 말한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각하지만 하나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도 성실하게 일하신다는 뜻이다.
또 하나님의 일하심은 주권적이지만 강제되지 않고 인간의 선택과 책임을 요구하신다. 엘리야의 첫 등장을 보면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릿 시냇가에서 숨고 초월적인 경험을 한다. 까마귀가 먹을 것을 물어다 주지? 그런데 얼마후에 비가 내리지 않아서 그릿 시내가 마르게 된다. 이제 엘리야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살기 위해서 사르밧 땅으로 가야했다. 이 장면을 잘 보시면 엘리야는 분명히 하나님의 초월적인 경험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물이 마름으로 이주를 해야 하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다시 정리하면 그는 초월 속에 있지만 동시에 세상의 조건 속에 종속되어 있는 이중적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런 모습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원리로 하나님은 초월적이시지만 역사와 실존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하심은 인간 실존의 반응과 서로 역학적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된다.
이렇게 결국은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선택과 책임과 무관하지 않다면, 그것이 얼만큼 영향을 받고 얼만큼 통제를 받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라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로마서 11:25)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절이지?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로 그들에게 구원이 그들에게 근거가 있지 않음을 가르치기 위해 로마서를 쓴 것이다. 바울은 “너희가 너희의 선택과 순종의 결과를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너희가 받은 구원은 신비로운 것이다”라고 하지? 왜냐하면 원래 이방의 구원은 이스라엘 구원의 충만함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아브라함의 복으로 인한 그것이 넘침으로 이방까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신앙의 순종에 실패하게 된다. 그들은 예수님을 외면했고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였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허락된 구원의 씨앗이 싹트지 않고 채워야 할 항아리가 채워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방에 물이 흘러갈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문제를 실존으로 이해해서 가져야한다. 지금 우리는 이방인으로 구원을 받은 천국 백성이다. 그러면 그 원인이 원래 의도되었던 이스라엘의 차고 넘침으로 우리에게 온 구원이 아니지?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구원은 원래의 원인으로 결과된 것이 아니다. 곧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원래 이방인의 자리에서 구원을 받은 너희는 이스라엘 보다 신실했고 더 나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될까? 이방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과되었듯이 이스라엘의 실패가 구원을 실패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 상기한 로마서 말씀의 핵심내용이다.
하나님의 하신 일에는 인과율을 넘어서는 신비가 있다.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 뜻에 순종해야 한다. 이 순종이 신자의 복이며, 책임이며, 특권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한다고 하나님이 제한을 받을까? 당연히 아니다. 엘리야가 아합을 물리쳐야 하나님의 뜻이 결과되고 엘리야가 실패하면 하나님의 뜻이 좌절되는 것이 아니라 아합과 같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영적으로 패역한 지도자가 나온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양보되는 일은 없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뜻의 성취는 그 복의 수혜자인 우리의 반응과 상응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한다. 당연히 해야 한다. 우리가 속한 나라, 세상을 위한 신자의 기도는 신자의 책임이며 가치이다. 그러나 그것이 근거나 조건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히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특권과 영광을 가지고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나라를 망하게 하실 수도 있고, 흥하게 하실 수도 있다. 그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며 한결같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가 많이 속는 것 중에 하나가 잘못된 것에 대해여 승리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이다. 이것을 오해해서 지난 역사 속에서 많은 교회들이 힘을 가지려는 싸움을 했다. 성경의 답은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됨의 가치를 지키는 문제이다. 그 가치를 지키다가 지거나 망하는 것이 신자의 명예요 영광이다. 우리는 자꾸 이기는 쪽으로만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 이겨도 져도 이런 어려움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가치를 지키게 해달라고 기도 해야겠지? 지난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회가 힘을 가지려 하고 이기려고 할 때 항상 교회는 큰 유혹에 넘어졌었다.
[기도]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For the jar of flour was not used up and the jug of oil did not run dry, in keeping with the word of the LORD spoken by Elijah. (열왕기상 17:16)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 앞에 신실하고 책임 있게 반응하며 살게 하옵시고, 성령님의 도우심과 말씀으로 영적인 분별과 통찰력을 가지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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