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볼때에 종종 구약을 신약의 그림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 많이 등장합니다. 아담과 하와에서 지어주신 가죽옷-하나님의 어린양(義) 등 추상적이고 모호하던 개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성경 기자는 과연 자신이 기록한 이 사건이 수천 년이 지난 후 누군가에게 투영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진 모르지만 그 사건은 사람에게는 수천 년이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찰나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이 모리아 땅에 있는 어느 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되개기며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1. 네 아들 이삭을 바치라.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나님에게 약속받고 25년이 지난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이야기합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창22:2)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일4:9)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시고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짐을 싣고 아들을 깨우고 길을 나섭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마음일지, 참혹한 그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 마음은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심정을 이해해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해야 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아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 속에서 사라의 대한 언급이 없는데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때의 이삭의 나이를 37세로 보는 것으로 유추해볼때, 유대인들은 127세라는 당시로서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사라가 이일로 인한 충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2. 모리아 산으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과 종 두명을 데리고 하나님이 명한 모리아산의 어느 한 산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리아 산에는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고, 그 예루살렘에는 골고다 언덕도 있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역대하3:1)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러러..."(막11:10-11)
아브라함은 길을 떠난지 3일만에 모리아 땅의 그 산에 도착합니다. 단숨에 갈 수 있는 거리도 왜 그렇게 멀리까지 갔어야 했을까? 가까운 산에서 번제를 드리면 안되었을까? 당장 번제를 바치라하면 경황없이 아들을 바쳤을지도 모르지만, 3일 동안 길을 가면서 아들과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밥도 같이 먹는 그 시간이 아브라함에게는 짧고도 긴 시간이고 하나님 말씀을 따를지 말지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중간에 다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아브라함은 그 모리아산까지 묵묵히 나아갔습니다.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창22:4)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막14:1)
아브라함이 출발 한지 3일째 되는 날 모리아의 산에 도착하여 이삭을 바치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 또한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모의한지 3일째 되는 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리고 그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다는 진리가 성취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3. 아브라함과 이삭만 산에 오르다
모리아의 산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번제할 나무를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들고 오릅니다. 번제에 쓰는 나무는 적은 양이 아니었을 텐데 그것들을 어깨에 맬 수 있을 정도의 체격이라면 이삭은 어린아이는 아니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이삭은 자기를 태워 번제로 드려질 나무를 스스로 짊어졌고, 예수 그리스도 또한 자신이 달려죽을 나무 십자가를 직접 짊어지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창22:6)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요19:17)
그때에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번제할 양을 어디 있습니까?" 이 말을 듣는 아브라함은 차마 네가 그 번제양이라 말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삭의 질문은 원어적으로 정말로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질문의 형식은 모르고 묻는 것이 아닌 답을 알고 물을 때에 쓰는 형식입니다.
"아담에 네가 어디있느냐?"
이삭은 자신이 드려질 제물이라는 것을 알고 묻습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22:7)
(제가 번제로 드려져야 하나요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눅22:42)
4. 이삭이 순종하다
이삭의 질문에 하나님이 스스로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대답한 후에 둘이 동행했다는 구절은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삭과 아브라함이 한 마음이 되었기에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뒤로 하고 떠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잔을 옮겨달라 기도하지만, 결국엔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며 하나님과 한 마음으로 동행한 것처럼 이삭과 아브라함을 이야기하며 성경은 2번이나 함께 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는 것은 이삭의 동의와 순종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양이나 염소들과는 다르게 순종했다고 하더라도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이삭이 손을 들어 아브라함을 막고 도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방지하고 둘이 한마음으로 동의하여 손과 발을 묶음으로 혹시 모를 상황에도 대비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내리치려할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아브라함을 제지하고 이삭을 구원합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아시지만 사람은 자신이 믿는다 하고 진심이어도 정작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려워하는 존재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13:37)
베드로 예수님을 결코 배신하지 않겠다 호언장담하던 그 순간의 베드로의 마음만은 진심이나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증명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약 2:24)
진정한 믿음은 마음과 행함이 함께 갈때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는 척이 아니라 진정으로 바치려는 마음으로 행동할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알아주신 것처럼,
이삭 또한 아버지의 말을 통해 하나님을 믿음으로 순종하고 스스로 묶임당한 것처럼 자신의 믿음을 가만히 있는 행함으로 증명합니다.
이 순간에 아브라함의 믿음과 이삭의 믿음은 별개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습니다. 그리고 이삭에게 아브라함으로 들어왔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체험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수많은 모태신앙으로 자라난 기독교인 자녀들이 경험하는 것처럼 부모의 믿음으로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 같은 느낌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과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의 무대로 주인공이 옮겨갑니다.
5. 마무리하며
여러 의미에서 이 사건은 창세기에서 중요한 사건 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을 증명함으로 하나님의 인정함을 받고 이삭은 아버지를 떠나 자신이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는 사건이며, 하나님은 자신이 준비한 숫양을 보내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그림자처럼 미리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식을 잃은 슬픔을 경험하지 않게 하시고 이삭또한 아버지에게 죽임당함을 겪지 않게 하시지만, 하나님 스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 앞에 내어놓았고, 예수님 또한 죽임 당한 그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그 슬픔을 감당하시고 우리에게 그 슬픔을 덜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기에 감사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장 5-8절)
'무목사 메세지 > 성경 속 주연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 속 주연] #7-2 야곱,벧엘로 돌아가라 (0) | 2020.06.18 |
---|---|
[성경 속 주연] #7 험악한 세월을 보낸 사람, 야곱(feat.신자의 삶) (0) | 2020.06.06 |
[성경 속 주연] #5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0) | 2020.05.09 |
[성경 속 주연] #4-2 노아, 흩어진 후손(바벨) (0) | 2020.04.24 |
[성경 속 주연] #4-1 노아, 의심없는 자 (0) | 2020.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