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창세기 11장에서 노아의 후손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브라함의 등장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노아의 세아들 중에서 셈의 자손으로 복의 길을 따라가는 첫 사람입니다.
[성경 속 조연]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 조카 롯, 첩이었던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까지 다루면서 아브라함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많이 다루었습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에게 집중해서 나눠보려고 합니다.
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과 성경이 이야기하는 믿음이 조금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은 '그의 믿음이 근거가 되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선택된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저와 여러분에게 적용되는 구원의 메세지를 품은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로마서를 보아야 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 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로마서 4:2)
이 말씀을 통해 보면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근거가 아브라함에게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성경속에서 어디서 등장하는 것을 아는 것도 아브라함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단서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1장 끝부분에서 시작됩니다. 창세기 1-11장까지를 시간이 흐르지 않는 원역사라고 한다면 아브라함이 등장하면서 원역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과 구속이 구체적인 사람, 아브라함을 통해서 적용되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을 찾아온 하나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그가 하나님을 찾아간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신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구체적인 한 사람 아브라함에게 적용되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와 우르에서 꺼내어 가나안으로 이끌어 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던 자도 아니고 오히려 이방신을 섬기던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갑자기 하나님을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난다? 우상 신상 앞에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던 사람이 한순간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순종함으로 가나안으로 떠난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여호수아 24:2-3)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모세가 광야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설교입니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을 이야기합니다. 여호수아 24장의 말씀이 정당한 기록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와 아브라함이 이방의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하나님이 그곳에서 아브라함을 꺼냈다는 것입니다.
'무엇 무엇 했으나,~' 뒤에 따라오는 말은 앞에 있는 내용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본다면 "우리는 죄를 지었고, 벌을 받았다."하면 당연하고 상식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는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셨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동안에 주도권은 아브라함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 그 여정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얻은 구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건이고, 이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 믿음없는 아브라함을 보고 성경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사실 '아브라함은 의심의 조상이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연약한 존재이다!'가 맞는데 하나님은 그를 불러내고 '아니, 너는 믿음의 조상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겠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나를 정직하게 바라보면 한심하고 악하고 의심많고 죄인인데 하나님은 그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주십니다. '네가 나한테 잘하고 믿음이 좋으면 내가 사랑해줄게'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믿음도 없고 죄가 여전히 많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하늘 영광 버리시고 가장 작은 동네 베들레헴의 허름한 마구간의 말구유에 오십니다. 그리고 죽음과 해골의 언덕 골고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순종입니다. 처음엔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채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믿음의 끝은 이해입니다. 나중에 가서야 우리는 이해하게 됩니다. 왜 떠나라 하신지 이해하지 못한채 순종으로 떠나던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밑져야 본전이다 하는 마음으로 믿음생활을 시작합니다. 믿음이 있어서 교회를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다시 의심하고 두려워하고를 반복하던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은 너희는 내가 사랑하는 내 아들, 딸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받고 25년간 수많은 사건을 경험하고, 또 시간이 흘러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지체하기지 않고 바치겠습니다하고 고백하던 아브라함처럼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사랑이 누구인가? 아브라함이고 저 자신이고 여러분입니다.
4. 사랑을 체험하는 법
제가 종종 구체적인 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추상적으로 행복하게 해주세요, 부자되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기도를 하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는 마음 속에 소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소원들이 하나님안에서 선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그것이 더디 이루어지면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마음이 상하면 허탈함, 무기력함,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음을 버리게까지 됩니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생명나무입니다. 이 생명나무는 우리에게 생기를 가져다 줍니다. 소원이 이루어지면 마음에 힘을 얻고 영적, 육적, 정서적으로 모든 면에서 생기를 갖게 됩니다. 작은 소원이라도 그것이 이루어지면 그 기쁨은 삶에 생명력을 가져다줍니다.
큰 성공은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성공이 연속되면 어느 날 큰 성공이 오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큰 성공, 큰 소원만을 꿈꾸며 자신도 잘 모르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성공과 행복을 위해 기도하기보다 삶에서의 작은 성취를 이루고 작원 소원들이 이루어질때마다 주시는 기쁨을 충분히 누려야 합니다.
매일의 삶이 힘든 일만 있는 것 같지만 잘 찾아보면 작은 기도들이 성취될 때도 많습니다. 그것들이 주는 유익을 누리면서 생기과 힘을 통해 삶의 회복을 경험해야 합니다. 인생은 한방이라고 하지만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실패만 하다가 갑자기 로또에 당첨되듯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이어나갈 원동력과 아주 작은 성공들을 이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아주 작은 기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경험하고 그 안에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믿음을 키워나가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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