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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목사 메세지/성경 속 주연들

[성경 속 주연] #7 험악한 세월을 보낸 사람, 야곱(feat.신자의 삶)

  성경에서는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대체로 분량에 따라서 그 인물의 중요도가 판가름 되기도 합니다. 그런면에서 야곱은 창세기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야곱에 대해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이전에 나눈 야곱의 부인 레아와 야곱의 아들편과 딸 디나편을 보면 좀 더 야곱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나눌 부분은 야곱의 노년에 고백을 통해 야곱이라는 사람을 살펴볼 것입니다. 야곱이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살아있음을 알게되고, 애굽의 2인자인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나 애굽의 왕 바로 앞에서 하는 고백을 통해 야곱을 엿보고자 합니다.

1. 야곱의 생애
야곱의 노년을 바라보면서 야곱의 인생을 쭉 생각해봤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이삭의 아들, 쌍둥이 동생, 속이는 자, 장자권을 산 사람, 장막에 거하던 자, 어머니의 사랑을 받던 아들,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은 아들, 쌍둥이형에게 살해위협을 받아 삼촌집으로 도망한 동생, 라반에게 속아 14년동안 고생한 조카, 속인 삼촌에게조차 성실히 일한 사람, 한명의 여자를 사랑한 남자, 4명의 부인 사이에서 갈등을 겪던 사람,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자, 아들들을 편애하던 아버지, 아들들에게 속아 사랑하는 아들을 죽은줄 알고 슬퍼하던 아버지...

야곱을 보면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았더니 이렇게나 많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경속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죽은 줄만 알았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만나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야곱의 고백이 저는 진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창46:29-30]
"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야곱을 우리는 속이는 자라고 기억하지만 이름조차 속이는 자라고 지어진 야곱은 자신이 속이고 싶어서 엄마 뱃속에서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창25: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속이는 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던 야곱에게 자신의 이름이 싫었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름과 반대로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장자권을 사는 것도 속이고 산 것이 아니라 에서에게 정당하게 값을 지불합니다.

[창25: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오히려 자신이 팔아놓고 적당히 시간이 지난후에 흐지부지 넘어가려한 에서가 기만하던 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창27:13]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아버지 이삭을 속일때도 자신의 의견이 없이 어머니의 등쌀에 시키는대로 행합니다. 물론 그 어머니의 잘못된 방법으로 인해 삼촌집에 도망하여 그후로 다시는 어머니를 보지도 못하고 어머니의 죽음조차 지키지 못하는 비극이 따라왔지만 말입니다.

[창29: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원했으나 라반이 라헬을 사랑하는 야곱이 마음을 이용해 레아를 먼저 시집보내어 14년간 종처럼 부릴 때에도 성실히 그 집의 양과 염소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저는 누군가 저를 속이는 걸을 알고도 일관되게 가 사람를 섬길 자신이 없습니다. 화가나서 그 관계를 유지할 인내심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어려운 것을 해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속이는 자라는 이름과는 정반대로 어떻게는 책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노력하는 완벽주의자 같은 사람입니다.

야곱이 사랑한 것은 라헬입니다. 야곱은 레아와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빌하와 실바를 첩으로 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그 야곱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저는 야곱의 이야기를 볼때면 안타깝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2. 바로왕 앞에서의 고백
[창47: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애굽의 왕 바로 앞에서의 고백이 그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 아버지 집에서, 삼촌의 집에서, 들에서, 성경 인물 속에서 어떤 인물보다 더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아간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지를 보여줍니다. 우여곡절 많고 슬픔과 상실의 세월이 어떻게 보상받는지, 죽은줄 알았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살아있고 가뭄과 기근에서 벗어나 애굽의 2인자가 되어 말년을 같이 보내게 되었는지를 보면서 알게됩니다.

자신의 슬픔의 세월이 변하여 요셉이 총리가 되고 전 지구적 재난속에서 살아남아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 되는지를 보면서 신자(믿는자,信子)들은 야곱을 보아라 하나님이 보상해주신다면서 영적인 믿음을 강조하고 나중에 따라올 복을 기대하라고 가르치고 배워왔습니다.

신자의 삶은 영적이고 본능이나 정욕같은 육적인 것이 아닌 그것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바라는 사람이 되기를 교회에서는 강조합니다.

야곱의 고백에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그러한 신자의 삶에 '험악함'이 실제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이지만 여전히 사람이라는 것, 믿어도 사람은 사람이라는, 믿음으로 극복하고 초월하고 감사라고 고백해도 지워지지 않은 험악한 세월의 기억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 그리고 이스라엘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그 이름은 모든 믿는 자들의 대표입니다.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하는 하나님의 수많은 말씀이 우리 신자들을 향한 메세지 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아픔이, 상처가 마냥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 온전히 다 치유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짊어져야 하는 아픔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능력이 아니라 내가 짊어질 분량의 짐이고 상처입니다.(아래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고후12:7-10]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3. 사람냄새나는 신자
결과적으로 좋은것이 되었으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절대 좋을 수 없었고 죽지못해 사는 시간이었다는 것, 스올을 향해 걸어가는 시간이었다는 야곱의 고백처럼,

[창37:34-35]
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130년을 살아가면서 마음껏 웃으며 살지 못하고 기뻐서 웃지 못하는 기쁨을 보면서 야곱의 마음 속에 알알이 박힌 새까맣게 죽은 속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그 험악한 세월에 방점을 찍고 오래 머물며 그 마음에 함께 해주어야 합니다.

신자의 삶에서 믿을 신에 방점을 찍고 은혜받은 사실에만, 그 결과에만 집중하고 믿음을 강요하고 영적이려고 열심이려고만 할수록 세상을 교회를 멀리하고 시대에 동떨어진 집단으로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교회는 믿음(信)만 강조한 것이 아닐까? 이제는 신자의 삶에서 사람(子)에 귀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 사람들을 섯불리 개조하려하고 내 말듣고 내 말대로 해야 복받아 하고 주입하고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서 말로만 믿는다 고백하게 만들지 말고 각자가 경험한 험악한 세월이 어떤지 느긋하고 여유있게 들어줘야 합니다. 믿고 나서 영유할 영적인 삶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희노애락과 생노병사의 모든 시간을 헤아려줘야 합니다.

인간미 없이 영적미, 경건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냄새 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다니고 상스럽고 거칠던 언어가 바뀌고, 온갖 방탕했던 생활이 바뀐다고 해도 인간적으로 기본적인 소양이 부족하고 공감의 능력이 떨어진다면, 그 사람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신자입니다. 그 입술의 고백은 영향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기만이고 주변인들의 반발만 살뿐입니다.

은혜라는 말로 적당히 퉁치지 말고, 스스로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을 얼마나 감당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우리의 신앙을 삶에서 잘 녹여내야합니다.

어려워 죽겠고 미워죽겠는데 용서해라 치유받아라 하는 말에 억지로 용서한 척, 치유받은척, 은혜받은 척 그만두고 시간을 가지길 바랍니다. 기준을 세워서 닥닥거리지도 말고 괜히 '척'하지도 말고 피상적인 관계로 멀어지지 말고 문턱낮은 따듯한 공동체, 사람냄새나는 교회, 사람냄새나는 '신자'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