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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목사 메세지/성경 속 주연들

[성경 속 주연] #4-2 노아, 흩어진 후손(바벨)

  지난번에는 홍수전 노아의 이야기를 나눠보았고,그보다 더 전에는 노아의 아들들에 대해서 나눠보았습니다.

[성경 속 조연 #2 셈, 함, 야벳(노아의 아들) - https://jiujitsu-pastor.tistory.com/m/3]

오늘은 그 노아의 세 아들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합니다.

1. 홍수 이후 사람들과 바벨탑 사건
홍수 이후 노아의 세 아들들은 자녀를 낳고 번성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벨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11:9)

저는 이제까지 홍수와 바벨이 엄청 오랜기간이 걸린 이후에야 생긴 사건인줄만 알았는데 간단한 수학을 통해 생각보다 더 빨리 일어난 사건임을 알았습니다.

창세기 10장에 야벳과 함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창10:2-5)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야벳-고멜-아스그나스), 3대 만에 여러나라 백성으로 나뉘고 각기 언어와 종족이 나라대로 나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서 함의 족보가 나옵니다.

"함의 아들구스미스라임가나안이요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창10:6-10)

함-구스-니므롯

함의 손자, 노아의 증손자 니므롯을 향해 성경은 용사고 용감한 사냥꾼이며, 그가 세운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11장에서 이 시날과 바벨이 등장합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11:1-4)

 

노아의 증손자 니므롯이 동방으로 내려가면서 확장하다가 시날평지에 바벨을 세웁니다. 그리고 거기서 사람들은 우리가 하늘위까지 탑을 쌓자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가진 최고의 기술인 벽돌을 굽고 진흙대신 역청을 발라 건물을 세워 하늘끝까지 닿고자 하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먼저, 이때 노아는 살아있었을까?

노아는 500세에 부름받아 100년간 방주를 짓고 살아남은 인류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셈의 후손으로 비벨사건 당시 노아의 나이를 예상해보자면,

셈은 홍수 2년뒤인 100세에 아르박삿을,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셀라는 30세에 에벨을,
에벨은 34세에 벨렉을, 벨렉은 30세에 르우를,
르우는 32세에 스룩을, 스룩은 30세에 나홀을,
나홀은 29세에 데라를, 데라는 70세에 아브람을

자, 이제 더하기를 해봅시다.2+35+30+34=101
증손자 니므롯이 태어난 시대를 보면 대충 잡아서
100년입니다. 그럼 그때 노아의 나이는 700세쯤인데
노아는 950세를 산 사람입니다.
심지어 아브람이 태어날때까지도 살아있습니다.
(성경에 드러난 인물들의 나이만 계산해보았을때)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창9:28-29)

 

노아가 아직 한참 살아있고 노아의 아들들까지 다 살아있을 그 때에 그 후손들이 바벨탑을 쌓은 것입니다. 나는 믿음의 3대, 4대다 하는 것은 교만함을 부추기는 말입니다. 노아의 3대, 4대의 모습을 보면서 모태신앙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교만하지는 않았나 돌아봐야합니다.

2. 바벨탑의 죄악

저는 바벨탑 사건에서 선악과 사건을 바라봅니다.
최초로 하나님이 명령한 사건을 정면을 거부하기 시작한 인류의 죄가 다시 바벨탑 사건에서 나타납니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창9:7)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말라한 명령을 어김처럼 홍수이후에 하나님은 노아와 세 아들에게 땅에 가득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니므롯과 사람들은 시날 평지에 모여 흩어지지 말자! 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냥 흩어지지만 않는것이 아니라,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11:4)

1) 하나님과 같이 되려했던 아담과 하와처럼 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하려는 사람들,

2)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마치 가인이 울타리를 치고 자신의 아들의 이름으로 에녹성이라 명한 것처럼)

3) 온땅에 번성하라는 명령을 정면으로 어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선악과에서 나타났던 죄악의 씨앗바벨탑을 쌓을 때에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하늘에 닿고자 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면서 선악과를 먹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바벨탑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지혜로워지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여주는
결정판이다."

바벨탑은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그 '종류대로'를 따르지 않고 획일화를 추구하는 곳입니다. 인간의 삶을 계획하고 조정하며 약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지배구조를 만들어냅니다. 창조세계를 파괴하는 결과가 만들어집니다. 바벨탑의 꼭대기에 설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기에 남을 누르고 남보다 조금 더 올라가려는, 남보다 잘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바벨탑의 가치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정반대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경멸하고 크면 클수록 강할수록 좋다 여깁니다. 선두 주자가 되려하고 세계최초, 세계최고를 추구하고 줄세워 등수를 매깁니다. 봉사보다 지배를 추구하고 노예를 만들어 지배하는 주인이 되려는 곳입니다. 소통보다 지시를, 대화보다 메모를 사용하는 곳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와 비슷합니다.

올림픽 시즌이 되면 저는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기독교방송에서 금메달리스트들 가운데 누군가 교회를 다닌다 하면 그 사람을 방송국에 불러다 간증을 듣고 그의 말을 전국에 내보냅니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열심히 믿고, 교회 잘다니고, 기도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의 은혜로, 금메달을 따게 되었습니다."

거의 공통된 말입니다. 그들의 감사가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좋으면 금메달 딴다, 일등한다, 최고가 된다라는 세상의 가치관이 바벨의 가치가 교회안에 믿는다는 사람들 가운데 자리잡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조차 아무도 성적을 내지 못한 선수들은 신경쓰지 않습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저것봐! 저 사람처럼 너도 교회 열심히 다니면, 일등할거야, 성공할거야." 이런 동기부여는 실패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금메달리스트 말고도 믿음 있는 수많은 선수들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그들의 믿음과 노력을 저 바닥으로 내동이쳐버립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듣고 꿈을 키운 아이들의 대부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좌절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음을 져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당당히 요구합니다.

교회 잘다니면 수능 잘본다더니, 대학 잘간다더니, 취업한다더니, 성공한다며 근데 왜 나는 이모양 이꼴이야! 이런 생각은 제가 했던 생각입니다. 수능보기 전까지 매일 성경보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수능날까지도 성경을 보던 저는 그 어떤 모의고사보다도 낮은 점수를 받고 화를 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배드리기 싫고 하나님이 없다고 결론내렸던 저의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그러한 줄세우기 문화, 그런 기복신앙은 옳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 얼마나 치명적이고 추악한지 창세기 1-11장에서 점차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11장 바벨탑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가인의 길을 따라가면 결국 라멕과 홍수와 바벨탑을 이어가는 여정을 이어갑니다.

 

성경은 바벨탑 사건이후에 셈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그 중에 한사람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부터는 파괴된 열방이 어떻게 치유되고 회복되어가는지를 보여주는 복의 역사가 시작됩니다.복의 역사는 아이를 낳지 못하던 사람,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고 상처가 가득한 사람들을 통해 흘러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마을 벧엘의 어느 한 마굿간 말구유에서 태어나, 자신을 죽이려는 헤롯왕을 피해 도망가고, 가난한 동네 갈릴리에서도 더 가난한 나사렛에서 자라나, 비천하게 여겨지는 목수일을 합니다.


더 낮은 곳으로 누구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간
예수그리스도를 닮아 살아간다는 뜻의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있나요?

여러분은 바벨탑의 가치, 세상의 가치로 살아가나요
하나님 나라의 가치, 예수를 닮은 삶을 살아가나요?

마무리하며,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2월부터 지금까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고, 특히 다른 곳보다 교회는 더 강력한 검사를 받고 있는 이때에 종교탄압하지말라 외치며 공무원들과 몸싸움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옳은가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 흩어짐에도 모임에도 감사하는 성도되길 바랍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80% 이상의 대부분 교회들은 자리가 이미 널널해서 조금만 더 여유있게 앉으면 되고 재정에서 심각한 타격이 없습니다. 반면에 큰교회들은 예배진행에 어려움을 겪고 재정적 타격이 크게 다가옵니다.
큰교회로 큰교회로 모이던 사람들이 나눠지고 집에서 혹은 소규모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바벨탑에 모인 사람들을 흩으신것처럼 코로나19로 인해 서로 흩어져 떨어져앉고, 전 세계가 나라도 동네도 그 자리에 가만히 움직이지 말고 돌아다니지 말고 잠시동안 그대로 있어! 하는 것처럼 멈췄습니다.

눈에도 보이지 않은 바이러스로 인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며 잘난척하고 꼭대기에 올라있던 각 나라의 정상들의 고개가 팍!하고 수구러드는 이번 일을 보면서,
우리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우리의 교회는 정말로 예수그리스도의 몸이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꼭대기를 바라보는 바벨에서 낮은 곳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