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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

역대하 17-20장, 아합의 죽음

2020년 5월 14일(목)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역대하 17-20장

1. 오늘 우리가 걷는 말씀에는 아합의 죽음이 나옵니다. 그는 남왕국 유다왕 여호사밧과 동맹하여 아람과 전쟁터에 갔다가 길르앗 라못이라는 곳에서 죽게 됩니다. 그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특이한 것은, 하나님이 아합을 속여서 죽음의 자리로 끌고 갔다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속이심을 이해하려면 아합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합은 ‘속이는 자’입니다. 이것이 아합의 전 생애에 걸쳐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아합은 자신을 속이고, 신앙을 속이고, 인생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입니다.

2. ‘속인다’는 표현은 아합이 매우 ‘모호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갈멜산 전투에서나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을 때를 보면, 그 자신이 주도적이지 않습니다. 그 부인에게 떠밀려서 쩔쩔매는 모습으로 그려지기에, 정말 본인이 원하는지 아닌지가 애매모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북이스라엘의 왕이기에 최고의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길르앗 라못의 전투에서도 그는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동맹한 유다의 왕 여호사밧이 이 전쟁에 대해서 물을 만한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아합은 선지자 미가야가 있는데, 저 사람은 아합 자신에 대해서 나쁜 것만 예언한다고 말을 합니다(역대하 18:7). 그리고 미가야의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합은 미가야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면서도 그가 자기가 듣기 싫은 말만 한다도 싫다고 합니다. 미가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인데, 아합이 미가야를 싫어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3. 하지만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강권해서 선지자 미가야를 만납니다. 미가야는 두 왕에게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십시오.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합은 “내가 몇 번이나 네게 맹세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으로만 내게 말하겠느냐?”라고 말합니다(역대하 18:15). 다른 때와는 달리 미가야가 자기의 편을 드는 듯한 이야기를 하니까 거짓말하지 말라고 다구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면은 하늘나라의 회의장으로 옮겨갑니다. 하늘 보좌에 하나님이 앉으시고 하늘의 만군이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서 그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게 하여 죽게 할까?’ 하십니다(역대하 18:19). 그러자 한 영이 나와서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라고 답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역대하 18:21) 라고 하십니다.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가서 속여라! 그렇게 아합을 죽여라! 이렇게 된 사건입니다.

4.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속이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합의 애매모호함을 먼저 살펴봅니다. 아합이 애매하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신앙을 헌신과 연결시키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애매한 헌신’은 아합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기 매우 적절한 메세지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각자가 자기의 판단과 결정으로 사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자기의 주인으로 자유를 누리지만 실상은 불안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책임질 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믿는다고 말해도 헌신을 하지 못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오늘 조금 깊이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로서 선택하는 가장 최고의 수준입니다. 그리고 신앙보다는 낮지만, 인간이 존귀하기에 선택하는 고급한 것이 ‘꿈’입니다. 그 아래에 ‘지식’이 있습니다. 신앙>꿈>지식 이런 순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이나 꿈에는 잘 헌신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하급한 지식에는 헌신을 합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 내지는 증명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헌신과 분리된 지식은 없고, 신앙의 경지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이 헌신으로 묶이지 않는다면 실상은 지식도 가지지 못한 것이 되는데 말입니다. 문장이 조금 어렵지만 그렇습니다. 헌신되지 않은 믿음은 분간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애매함’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보이는 태도입니다. 신앙의 회색지대로 가는 것입니다. 이 애매함은 쉽게 회의(懷疑, scepticism)로 갑니다.

5. 아합의 믿음은 헌신되지 않은 믿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분명치 않음을 핑계댑니다. 자신의 믿음을 헌신하지 않을 때, 우리는 헌신의 대상이 증거를 주어야 한다고 책임을 전가 혹은 회피합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리로 가라’하시면 내가 왜 안가겠습니까? 갈려고 하면 빨강신호가 걸리는데 어떻게 갑니까?”라는 것이 우리의 주장아닙니까? 그런데 본문의 사건은 하나님이 대조됩니다. 아합을 죽이시겠답니다. 하나님은 결코 모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속여서 까지 죽이십니다.

6.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속이신다’를 이해하는 것이 남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해해 보았습니다. 속인다는 것은 어지간한 정성으로는 안됩니다. 화를 내는 것도 아무 상관이 없으면 화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관계에서 화를 낸다는 것은 헤어지자가 아니라 화해하자는 마음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돌아서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속인다는 것으로 예를들면, ‘내가 무엇인들 네게 못해주겠니?’하면 자기가 뭔데 무엇인들 다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죽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은 죽이시는 것만이 아니라, 죽으심으로 당신의 진정성에 대해서 성실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되심에 대하여 보류하거나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진정하게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의 은혜와 자비를 열심으로 이루십니다.

7.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이시며, 사랑의 하나님으로 무한한 권능으로 우리를 지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대강이루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필요하다면 당신을 죽이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죽음에 담갔다가 꺼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존재(New Being)’입니다. 변한 것이 아닙니다. 자꾸 변하는 것으로 나를 보기에 새로운 존재라는 것을 누리지 못합니다. 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된 것입니다. 전에는 죄인으로, 사망이 다스리는 존재로 실수하고 연약했다면,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로 실수하고 연약한 것입니다.

8. 우리가 잘 하는 얍복나루에서 야곱과 하나님과의 씨름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야곱에게 씨름을 거셨습니다. 야곱의 고집을 꺽으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곱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의 관절을 꺽고 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복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한 약속이고, 벧엘에서도 주신 약속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이 주신 복의 수준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삽니다. 그는 자기가 자기를 운영해야 하는 고달픈 인생을 삽니다. 처음 속였던 형과의 화해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성공한 것 같지만 불안합니다. 손에 쥔것 같은데 허무합니다.

그가 얍복나루터에서 밤새 고민하는 중에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 이 씨름의 의미는 ‘항복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항복하지 않습니다. 불안하니까 항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떠나려 하니까 ‘복을 주고 가시라’고 합니다. ‘이렇게 불안한 채로 인생을 살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가 이겼다’라고 하십니다. 대답이 기이합니다. 그러나 이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 드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주시기 위하여 지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복주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기지 못하십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식에게 졌다고 해서 부모가 부모가 아닌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시기도 합니다. 당신이 죽으시기도 합니다.

9. 스스로 보기에도 한심한 자기 모습에 대해서 무너지는, 또 스스로 버려진 것 같은 상황이나 환경, 스스로에 대한 건강한 자존감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참으로 딱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고, 그 원인이 주어진 것이든, 나의 선택으로 인한 고통이든 상관없이 비참하고 비천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첫째는 사람은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둘째는 말씀으로 대신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료,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리라.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니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1-39) 이렇게 하나님은 확실하십니다. 신앙은 꿈보다, 지식보다 격이 다르며, 신앙은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10. 하나님은 나를 위해 죽으실 수 있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습니다. 나도 사랑을 위하여 죽을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립보서 4:13). 바울은 이 말씀을 감옥에서 쓰고 있습니다. 나는 억울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곤고할 수 있습니다. 나의 환경이 곤고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어떤 인생이라도 감수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헌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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