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8일(월)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역대하 25-28장
1. 성경을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걸을 때 유념할 점은 신명기 사관(史觀, historical perspective)과 다윗언약(다윗사관)입니다. 신명기 사관은 모세가 기록한 신명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마디로 하면 ‘인과율’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나가도 벌을 받고 들어와도 벌을 받는다는 관점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먹고 걷다보면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들이 신명기사관을 통해 기록된것 처럼 보입니다.
2. 다윗언약은 신명기사관과는 달리 인과율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은혜는 인과율이 아닙니다. 원인이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신명기 사관(율법)을 적용하면 모두 죽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다윗언약(예수 그리스도, 은혜)를 적용하면 우리가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이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신명기 사관과 다윗언약이 서로 대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언약이 신명기 사관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가 구약의 구속사를 걸을 때 신명기 사관을 적용하는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정말 말하고 싶어하는 다윗언약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먹을 분량 안에 아하스가 나옵니다. 이 아하스의 왕에 대해서 신명기 사관과 다윗언약을 적용해 보겠습니다.
3. 아하스왕은 남왕조 유다의 왕입니다. 북왕조의 왕들이 모두 실패한 왕으로 기록되고 남왕조에는 좋은 왕들이 나타나는데, 아하스는 매우 악한 왕으로 등장합니다. 역대하 28:1에 기록된 대로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역대하 28:1b)라고 기록하고,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살랐다고 합니다(역대하 28:2-3). 이런 내용은 가나안 족속들이 가졌던 잔혹한 제사의식을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지방 곳곳에 산당을 만들어서 지방신들과 혼합되어 우상숭배의 본산지같이 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연합해서 유다를 치러 올라옵니다. 그로 인해 유다가 큰 곤욕을 치루고 앗수르 왕에게 원군을 청해서 위기를 극복합니다(역대하 28:16). 그 일로 인해서 앗수르 왕에게 성전의 중요한 것들을 주어야 했습니다. 아람왕과 이스라엘과의 전쟁만이 아니라 유다가 약해지자 주변의 작은 나라들도 유다에 반역을 했습니다. 도우러 왔던 앗수르도 돕지 않고 오히려 유다를 공격하고 성전과 왕궁과 귀족들의 보물들을 가져갑니다.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역대하 28:22) 라는 말씀은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더욱 악해졌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역대기의 판단은 신명기적 사관에 근거해서 기록이 됩니다. 신명기적 사관은 하나님께 순종하면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들어가도 나가도 벌을 받는 다는 조건적 약속입니다.
4. 그러나 이 일은 다만 신명기에 약속된 인과법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역사의 내용들이 있습니다. 아하스는 워낙 잘못했고, 잘못하여 벌받을 때 더욱 더 잘못한 곳으로 가서 하나님 앞에서 다른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장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에서도 다른 무엇이 개입됩니다. 역대기에서 아하스의 위치는 악한 왕입니다. 그에게 신명기적 잣대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잘 보시면, 전에도 그랬듯이 과정 과정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아하스에게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보입니다. 이 부분이 역대기에서 아하스가 가지는 중요한 위치입니다.
5. 이 아하스 이야기가 이사야서에 나옵니다. 이사야 7장은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아하스 왕 때에…”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사야를 통하여 아하스에게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이사야 7:10-12) 얼핏보면 기특한 대답같지만, 그 내용은 아하스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께 관심이 없습니다’ 라는 대답입니다. 그에 대해 이사야가 아하스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메시아의 탄생을 징조로 줍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
6. 놀랍게도 가장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아하스에게 메시아의 징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아하스의 기록은 신명기적 사관을 넘어선, 더 넓게 품고 있는 다윗언약이 적용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랍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어떻게 부르시는가?’ 저들의 행위와 저들의 선택의 결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의 선택과 잘잘못 이전에 하나님의 작정과 부르심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9:10-13)
7. 야곱과 에서는 이삭의 쌍둥이 아들입니다. 그 둘이 태어나기 전에, 어떤 선택과 결정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기로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그가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하나님이 이미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의 백성이 되었다는 설명 앞에 우리는 서있습니다. 그 예로 야곱과 에서를 드는 것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선택이 없고, 책임이 없다면 우리에게 어떤 권리가 남는가? 우리에게 책임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면 인간된 가치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결정이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결정에 있다면 거기에 무슨 근거와 질서와 공정함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로마서 9:14-16)
8. 이 말씀은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하나님 마음이다!’ 곧 엿장수 마음대로다! 이게 대답입니다. 이를 통해서 성경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픈 것일까?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신앙의 행위자가 주체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무게는 신앙행위자의 잘잘못이나 행위에 무게가 있지 않고, 우리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보상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지금 성경이 하는 이야기는 이 질서와 보상의 원칙보다 하나님이 ‘더 크시다’는 것입니다.
9. 만일 인과율의 법칙이 하나님의 전부라면, 우리 가운데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하면 상주십니다. 잘못하면 벌도 주십니다. 그러나 벌을 주기 위해 심판하시지 않고 교정하기 위해 벌을 주십니다. 잘하는 사람에게 상주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잘못한 사람도 상을 받게 인도해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관계적이고 인격적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권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법에 매여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는 기적이 있는 것입니다. 기적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러면 가장 큰 기적이 무엇일까요? 바로 ‘내가 구원 받은 것’입니다. 이 기적의 특징은 법칙이 파괴되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보다 큰 통치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비롭다’고 합니다.
10.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찾아오신다! 자비롭다! 기도한다! 이런 것들이 인과율을 넘어섭니다. 여러분 기도를 잘 보십시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인과율적인 것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잘 살펴보십시오. 하나님 내가 이런 저런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복주십시오. 기특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도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복주십시오. 이게 인과율입니까? 이런 억지가 어딧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는 그렇게 구해도 됩니다. 아무런 조건과 이유없이 잘못했습니다! 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 기도입니다. 이런 억지같은 기도를 ‘간구’라고 합니다.
그러면 마음대로 살아도 될까? 다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자녀로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를 인격으로 대하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물결 속에서 우리 안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속성, 곧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가르치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만들어가십니다.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개입하고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결과를 만들어 내십니다. 여러분들 신앙에 성공적이십니까? 잘 하셨습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 은혜를 구하십시오. 실패를 무질서와 혼돈과 게으름과 무책임으로 끌고 가지고 말고, 은혜를 구하는 곳으로 가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실패가 궁극적인 승리가 되게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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