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5일(금)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역대하 21-24장
1. 오늘 걷는 역대하 21장에 나오는 유다왕 여호람은 그 부인이 아합의 딸이어서 그 영향을 받아 북왕조 이스라엘 왕들이 늘 해온 신앙적인 실패와 반역의 길을 걸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여호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실패한 것 만이 아니라 국력도 쇠(衰)하여 져서 에돔과 립나가 독립해 나갔다고 기록합니다(역대하 21:10).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망할 때까지 북왕조 이스라엘은 한번도 선한 왕을 배출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늘 우상을 숭배하고 일찍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남왕조 유다는 중간 중간에 선한 왕이 나타나서 종교개혁을 일으키지만 결국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2. 그러나 역대하 21:7을 보면,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라고 기록했습니다. ‘등불’은 통치권을 상징합니다. 곧 다윗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왕권에 대한 약속을 근거로 해서 남왕조 유다 멸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유념할 것은, 북왕조 이스라엘과 남왕조 유다를 비교해서 볼 때, 북왕조에 선한 왕이 하나도 없었고, 그래도 남왕조는 나았다고 생각하기보다, 그들의 잘잘못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남왕조에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남왕조가 이어졌다는 것이 중요한 내용이 됩니다.
3. 그래도 ‘결국 남왕조도 멸망하지 않았는가?’의 문제는 ‘그렇지 않다’입니다. 다윗의 왕권(메시아의 계보)은 계속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십니다. 다윗언약은 신명기적(인과응보)이 아니라, 조건이 없는 ‘은혜’의 언약이라고 앞서 말씀드린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 다윗언약이 신명기적 언약을 크게 품고있는 모양이 됩니다. 이 또한 성경의 중요한 틀입니다. 이 다윗언약(아브라함)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성취되었고, 우리에게도 아직 유효하고, 왕성하며, 결국 모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 나라의 운명이 될 것입니다.
4. 남왕조 유다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버리시지 않겠다는 것, 저들의 책임으로 두어서 멸망하도록 놓아두지 않겠다는 것을 로마서에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로마서 9:27-29)
5. 이사야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고, 그 멸망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예언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신앙을 지키는데 실패했어도, 이스라엘의 운명은 그들의 행위와 실패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작정으로 결과된 것입니다.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와 같았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소돔과 고모라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은 수동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남겨두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라는 뜻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비교하여 강하거나, 권세가 크다는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생각과 소원과 책임을 벗어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성실하심입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언약은 다윗 가문에 대해서 그 가문이 항상 하나님의 통치의 수혜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은혜의 약속입니다.
6. ‘다윗언약’은 다윗이라는 이름때문에 다윗에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과 약속하신 하나님께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확인할 때 그것이 아브라함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으로 성경에 확보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인용되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대한 부분을 찾아봅니다. 이렇게 다윗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을 살피는 것은 모든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로마서 4:16-18)
7. 아브라함은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며 우리는 그의 믿음의 후손입니다. 상기한 로마서의 말씀은 창세기 17장을 인용, 정리한 것으로 잘 보시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조건이 되어 있는, 곧 인과율적인 내용으로 보여집니다. 구원을 어떻게 받습니까?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원인과 결과로 읽힙니다. 믿음이 원인이 되어서 구원의 결과를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아주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은 곳(갈대아 우르)과 상황에서 하나님을 부르셨다고 증거합니다.
8. 상기한 로마서 4:16-18을 잘 보시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원인이나 조건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이라고 합니다. 만일 믿음이 조건이라면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이라고 하지 않고 ‘그의 믿음은’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길래 그를 믿음으로 부르실 수 있었는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길래 의롭다하심을 조건없이 부르실 수 있는가? 그 대답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입니다.
부활의 하나님,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조건 없이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부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해서 아멘하면 안되고, 이 은혜를 내가 받았다는 것으로 아멘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조건이 걸리면 우리 중에 의롭다하심을 얻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9. 여호람은 북왕조 왕들이 행하는 데로 갔지만, 자기가 행한대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으로 결과를 받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다윗의 언약의 수혜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행한 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따라 대우를 받은 것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이 보기에 우리 자신이 못마땅하고 한심하기에 마음이 편치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건 없는 구원의 이야기를 계속 반복해야 하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우리가 여호람이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신자로 세상을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직면하는 가장 큰 당황스러운 것은 우리가 성도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곤경에 빠져있습니다. 우리가 불신자면 하나님을 모른다는 이유를 댈 수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알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하게 사는 것이 참으로 난처한 것이고, 우리의 입을 막습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실제는 소원만큼 현실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10. 우리와 믿지 않는 자들과의 차이는 나는 하나님을 믿고, 저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우리는 자꾸 믿음의 조상들에게 어떤 조건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이, 현실 속에서 어떤 존재라도 하나님이 부르실 수 있음으로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반드시 그 하나님이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안다는 뜻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한번 은혜로우시고 끝내는 분이 아니라, 시작을 은혜로 하시고, 은혜로 결과까지 만드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이시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다시 그 아들을 보내실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 있습니다.
11. 신앙은 하나님 앞에 자기가 잘 한 것을 자랑하러 나가는 수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나에게 하나님이 ‘항상’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망 스러운 우리의 한계를 보면서 탄식하지만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세상은 절망해야 합니다. 이게 다른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바보는, 정말 바보는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흔들리는 땅위에 서있습니다. 바로 서 있을 수 있는 환경과 조건 속에서 삽니다.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면 그것이 덪이 되어 언젠가는 나를 넘어뜨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내 발을 반석위에 세워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흔들림 속에 서있지만, 처음부터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실함으로 결국 우리를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신 다는 것을 아는 마음으로 오늘을 사는것이 신앙입니다.
12. 우리의 한계가 우리의 흔들림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신앙생활은 ‘관계’입니다. 이 관계의 비밀은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당신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속 하나님을 찾는 다면 맞는 것이고, 우리의 기도가 결국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되도록 만든다면 우리는 틀린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곤경을 제거하는 것이 예수님을 대신하지 않게 하십시오. 나를 내 손에 놓아두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나의 무지와 무식대로 갚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매일 매일, 순간 순간 나를 붙드소서. 우리는 남에게 요구하고 설명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내가 소원하는 인생을 살아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혹시 내가 정직하다 해도, 우리가 처한 환경은 요동치는 바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소망있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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