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이사야 22-25장
1.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이 23장에 나옵니다. 에스겔서에 가서 봅니다.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에스겔 28:5)
엄청난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재물을 얻게 된 두로와 시돈은 그 마음이 교만하여 졌습니다. 그 교만으로 말미암아 두로와 시돈가운데 이러한 재앙이 임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빛나는 왕관을 쓰고 있던 두로, 그 상인들은 귀족들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이 우러러보던 사람들이었는데, 두로를 두고 누가 이런 일을 계획하였겠느냐?그 일을 계획하신 분은 만군의 주님이시다. 온갖 영화를 누리며 으스대던 교만한 자들을 비천하게 만드시고, 이 세상에서 유명하다는 자들을 보잘 것 없이 만드시려고, 이런 계획을 세우셨다.”(에스겔 28:8-9, 새번역)
2. 우리는 앞에서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강함으로 인한 교만’으로 망했습니다. 23장의 두로와 시돈은 페니키아 인들입니다. 그들은 ‘부요함으로 인한 교만’으로 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다 죽이십니다. 힘을 의지하는 교만, 부함을 의지하는 교만을 멸하십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들을 상징하는 ‘세상의 가치관들’ 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십니다. 열국도 망하고 세상도 망하고 이스라엘도 망합니다. 그리고 가장 어두운 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참소망으로 오십니다.
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 중에 있노라”(고린도후서 10:3-6)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는 것이 심판의 목적입니다. 심판은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에 궁극적인 목적이나 가치로 삼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역사의 개입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것을 다 꺽어서 하나님 이외의 가치를 꺽어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일이, 외적으로는 무너뜨림이고, 당하는 입장에서는 환란과 고난인데, 이런 것들이 적극적으로는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가? 성경은 고난과 환란이 다(all)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이 고난에 관한 놀라운 증거가 히브리서에 나타납니다.
4.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브리서 5:8-9)
그가 아들이신데도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곧 온전은 고난을 통한 순종으로 결과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걸 잘 생각해 보시면, ‘순종’이 그 자체로 가치가 되어서 결과가 된 것이 아니라, 순종을 ‘통해서’ 온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통로’입니다.
하나님 이외되는 것들(애굽, 앗수르, 바벨론 등등)을 가치로 삼아서 그것들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이 요구하시는 궁극적인 승리와 가치와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데, 이 순종을 통해서 당신의 것을 채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종은 고난으로 완성된다고 합니다.
5. 고난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순종은 좋아합니다. 순종을 좋아하지만 안하고, 못합니다. 고난과 순종의 역학관계,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것, 이런 문제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선언이 나타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로마서 8:16-17)
여기서 고난은 영광과 그 가치가 대등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약속과 승리로 가는 길에 고난이 영광과 대등한 가치를 가진다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5장에서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습니다.
6.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노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로마서 5:1-4)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니 화평을 누리랍니다. 또 그로 말미암아 은혜에 들어감을 얻어서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이와 동등하게(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환란이 소개됩니다. 예수님을 얻어서 얻는 약속과 지위는 하나님과의 ‘화목’이고, ‘영’, 그리고 ‘환란’입니다.
7. 우리가 생각할 때 환란은 환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좌절과 고통, 불만과 실패의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 소개된 환란은 화목, 영광과 동등하게 주어진 하나님의 지혜의 조건이고 과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하는데, 우리가 나름 은혜를 받는 말씀구절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환란은 인내를 낳지 않습니다. 환란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은 그 환란을 극복한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곧 결과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 하는 얘깁니다. 실제로는 환란을 당하면 우리는 낙심하고 도망칩니다. 그런데 왜 환란이 인내로 이어지는가? 한가지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도망칠 길이 없어서 인내하게 됩니다. 방법이 없어서 할 수 없어서 망신스럽고, 창피하고, 숨어다니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내는 인내입니다.
8. 그런데 그 말이 안되는 인내가 어떻게 소망까지 가는가? 이것이 풀려야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계속 됩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로마서 5:5-6)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실 때 우리는 그분을 몰랐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실 때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소망을 만들어 진것은, 우리가 몰랐을 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된 것입니다. 그것이 뒤집어져서 우리의 구원이 된 것같이 환란이 이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9.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빌립보서에서는 아주 독특한 관점에서 소개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우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합니다(빌립보서 2:6-11).
자기를 채우지 않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높이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세상의 가치가 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가치를 소개한 것입니다. 이 영광을 온 세상이 감격합니다.
10. 세상적 가치관으로 연단받은 우리는 ‘믿음을 들고 힘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으로 내가 가자는 길로 가자’고 하십니다. 환란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포기하게 합니다. 그러나 무엇도 할 수 없어서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가 나에게서 나오지 않고, 할 수 없어서 나옵니다.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 인내합니다. 하나님은 그 인내의 끝에서 소망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걷는 이사야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된 인간은 매사를 선악의 구도로 봅니다. 열국의 멸망은 세상적인 것, 곧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지 않은 것의 멸망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선했는가? 이스라엘 역시 멸망합니다. 이스라엘 역시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들의 고통과 환란이 그들을 온전케 한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두에게 공평한 하나님의 공의를 만나게 됩니다. 동시에 사랑을 받게 됩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한 3:16a)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처럼 사랑하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입니다. 이사야 역시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포함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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