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21일(화)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예레미야 1-4장
1. 예레미야는 나라가 멸망해서 왕의 눈이 뽑히고,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극을 목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심지어 여인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자식을 삶아 먹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기적이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고, 그의 예언도 언제나 쓴 것이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나라가 망했지만 2-3년이면 돌아온다고 했고, 예레미야는 70년이 지나야 한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늘 울어야 했고, 우리는 그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그가 눈물을 흘리면서 써내려간 예언이 예레미야와 그의 애가입니다.
2. 예레미야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기원전 750년경 이사야 선지자에게 묵시가 내렸는데, 그 내용은 유다의 부패로 인해 북방 바벨론의 침략이 있을 것이며,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포로로 끌고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후 70년만에 바벨론은 메데 바사에게 멸망하게 된다는 묵시였습니다(이사야 13-14장, 44:16-28, 45:1-7, 46-47장).
이사야가 이런 예언을 한지 120년 정도가 지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도 임박한 환난를 묵시로 보여주셨습니다. 그가 본 묵시는 ‘끓는 가마’가 북방에서부터 기울어져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사야와 같은 묵시를 주셨습니다. 곧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교만한 자를 제하고 새로운 ‘순’으로 성전을 재건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이사야로 부터 시작되어 말라기 이전의 학개, 스가랴까지의 모든 선지자들이 고한 예언의 핵심입니다(에스겔 40-47장).
3. 그러므로 예레미야서는 에스겔서와 더불어 이사야서의 참고서의 역할을 합니다. 즉 이사야가 대표적으로 묵시를 받은 것이, 예레미야와 에스겔 시대에 임박한 현실로 다가와, 예레미야와 에스겔에 의해 재차 예언되고, 그들의 생전에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것을 신학에서는 ‘실천적 예언’이라고 합니다.
4. “베냐민 땅 아나곳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지 십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 (예레미야 1:1-3)
예레미야는 아나돗 출신입니다. 아나돗은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이 유명하거나 위대한 곳에서 시작되고 만들어 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작고 무명한 곳에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양치는 자리에서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화려한 궁정에서 쫒겨나 도망자의 신세로 광야에서 40년을 지나며 아무것도 아닌 자의 자리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메시아 이신 예수님은 갈릴리의 나사렛 작은 마을에서 자라셨습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곳’이 어디일까요? 그곳은 바로 ‘지금 내가 있는 자리’, ‘나의 일상’입니다.
5. 예레미야는 요시야 때부터 유다가 망했던 시드기야 때까지 다섯 왕의 통치를 보며 40년동안 사역을 했습니다. 이렇게 부르심의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시작할 때 시작하고, 끝낼 때 끝낼 수 있는 것이 사역입니다. 사역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예레미야 1:5) 예레미야가 존재하기 전부터 아시고, 모태에서부터 그를 구별해서 선지자로 부르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레미야의 ‘조건’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방해되거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6. 이것은 예레미야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쌍둥이도 다릅니다. 같은게 여러개면 ‘상품’이고, 단 하나 밖에 없으면 ‘작품’입니다. 우리는 상품이 아니라 작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목적’을 두셨습니다. 이것이 ‘부르심’입니다.
7. 이런 부르심에 대한 예레미야의 대답을 보십시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 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예레미야 1:6)
예레미야는 자신을 ‘아이’라고 합니다. 자신에 대한 자화상이 낮습니다. 겸손이 아니라 핑계입니다. 그가 속한 환경과 상황에비해 너무나 약합니다. 이런 예레미야의 반응에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8.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예레미야 1:7)
이 말씀의 의미는 ‘내가 너를 모르고 부른 것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를 당신의 사역자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두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살구나무 가지의 환상과 끓는 가마의 환상이었습니다. 예레미야1:12의 ‘지켜’ 앞에 작은 글씨로 1)이라 쓰여 있습니다. 아래에 ‘히, 살구나무라는 말과 지킨다는 말의 음이 비슷함’이라 되어 있습니다. ‘살구나무’는 ‘샤켓(shaqed)’이고, ‘지키다’는 ‘쇼켓(shoqed)’입니다. 살구나무는 우리나라의 매화처럼 가장 먼저 피어 봄이 왔음을 알리는 나무였습니다. 살구나무가 봄을 알리는 것처럼 심판이 임박했으니 잘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끓는 가마가 기울어진 것은 그 안에 있는 것이 ‘쏟아진다’는 의미로 심판이 실행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9. 예레미야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냥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1:18-19)
‘온 땅’, ‘유다 왕들’, ‘지도자들’, ‘제사장들’, ‘그 땅 백성’이 예레미야가 상대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들까지 모두 상대해야 하는 벅찬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10. 고대의 전쟁은 성을 뺏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이 너무 엄청나서 난공불락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 앞에 거대한 놋으로 만든 기둥과 벽이 엄청나게 견고해서 다 도저히 넘어뜨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 성읍과 놋성벽은 적들의 공격으로 인해 수없이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읍과 성벽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민족의 성읍과 놋방패로 삼아 주심으로 말미암아 유대 민족이 살고 예레미야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새로워 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예레미야의 뜻이 ‘여호와께서 세우신다’입니다. 예레미야는 민족 멸망이라는 고통스러운 시대에 던져져 그 민족을 세웠습니다. 즉 예레미야는 그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던져진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우리도 만만치 않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곳(세상)에 던져진 것입니다. 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데 쓰임받은 것이 성도의 명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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