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예레미야 9-12장
1. 예레미야 10장의 말씀은 이스라엘 집의 그 모든 죄악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이방 사람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예레미야 10:1-2)
‘여러나라’는 이방을 뜻합니다. 개역에는 ‘열방’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방 민족의 미신적 삶의 규범, 이교적 세계관, 우주관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일월성신을 두려워하며 거기에 예배합니다. 유다 백성이 빠진 모든 우상숭배도 다 이방사람들의 풍습에서 왔다고 합니다.
2. 그러나 그 우상이란 것은 산에서 벤 나무를 기술공이 도끼로 만든 허무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 나라의 풍습은 헛된 것이니 삼림에서 벤 나무요 기술공의 두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예레미야 10:3)
“그것이 둥근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메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그들에게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느니라”(예레미야 10:5)
3. 이러한 이방신들의 종착지는 하늘 아래에서 끝나는 것입니다(예레미야 10:11).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의 명철로 하늘을 펴셨으며 그가 목소리를 내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예레미야 10:12-13)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질서이며 섭리요, 경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리석고 무식해서 이렇게 행합니다.
4.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예레미야 10:14)
하나님의 질서와 섭리와 경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을 보고 느끼며 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은 참으로 딱한 사람입니다.
5. 예레미야는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이렇게 중보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예레미야 10: 23-24)
징계를 하시되 진노로 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매를 피할 수 없다면 살살 때리라는 겁니다. 당신의 백성 유다를 고려해 달라는 겁니다. 연민으로 징계해 달라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지금까지 분노하신 하나님과 강팍한 유다 백성들 사이에서 울며 기도합니다.
6.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더는 예언하지 말라고 하면서, 계속 예언하면 널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만류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유다를 위해 중보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징계가 불가피하다면 살살 매를 때려달라고 했습니다. 또한 백성들 앞에 가서는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이 죽이겠다고 협박하니까 억울하다고 하면서 주님이 보복해달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중보기도 해놓고서는 고향 사람들이 죽이겠다고 협박하니까 분노가 치밀어 보복해 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도 사람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반드시 벌하겠다고 하십니다. 청년들은 적들의 칼에 죽고, 어린아이들은 굶어 죽게 해서 아나돗 사람들은 한 사람도 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7. 이 과정에서 예레미야와 하나님의 변론이 나타납니다(예레미야 12장).
예레미야는 근본적인 회의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마치 하박국 선지자의 항의와 같습니다. ‘악한 자와 반역자가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며, 그들의 뿌리가 박히고 열매를 맺었다’고 합니다. 왜 악한 자와 반역자가 형통하도록 지켜보고만 계십니까? 이 백성은 당신이 심었는데 그들 모두는 입은 하나님께 가까우나 마음은 다 떠났다고 합니다(예레미야 12:2)
8. 오늘 걷는 본문에는 예레미야의 신정론(神正論, theodicy)적인 고민이 드러납니다.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특별히 신정론은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선하다 시다면 어째서 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물음에 대한 다양한 대답들입니다. 하나님에게 고통을 막을 수 있는 능력(전능)과 의지(선하심)가 있는데, 그럼에도 왜 하나님은 고통을 허용하는가를 물으며 존재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실제로 악을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고, 그렇지 못한 존재의 세계를 한탄하면서 일부는 불가지론이나 무신론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9. 고통에 대한 물음은, 인간이란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과 같이 고대부터 이어오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안에는 신정론에 대한 질문과 그 답을 면면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소경된것이 자신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놓고 논쟁합니다. 그러나 그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기 때문에 소경이 되기 위한 자기의 인과응보적인 잘못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소경됨은 그 자신의 죄나 그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소경됨이 하나님의 영광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9:3).
10. 우리가 겪는 고통이나 부조리에 대해 아무리 연구하고 답을 구해도 고통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당한 우리에게 답을 주시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은 연약하고 부서진 우리의 옆에 오셔서 함께하시며 동행하시는 성육신의 하나님이십니다. 고난은 구속의 섭리속에 자리잡은 하나님의 신비이며 방법입니다. 인생의 고난은 ‘하나님이 왜 고난을 주실까?’라는 질문을 넘어서, 이 고난이 나를 누구로 정의하느냐? 나는 어디로 이끄느냐? 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경이롭고 신비한 영적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통치는 우리의 형통함 가운데서, 그리고 우리의 고난 가운데서도 살아있습니다.
고난의 신비는 어느시대에서나 건강이나 부를 보장하는 생활방식을 가르쳐주는 코드로는 풀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에 대해 우리가 듣기 좋은 답변을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난을 살피시고, 우리의 고통을 함께 나누십니다(임마누엘). 그리고 그 속에서 생명을 만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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