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예레미야 5-8장
1. 고통을 지나는 큰 지혜 중에 하나는 ‘견디는 것’입니다. 고통을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당기거나 미는 힘’이라고 한다면, 견디는 것은 ‘(멈추어서)지탱하는 힘’입니다. 고통을 견디는 것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 잘 아는 법칙이 있습니다. 운동을 하다보면 어느 지점에서 힘과 체력이 다하는 지점에 옵니다. 그때 몸의 근섬유가 찢어지면서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그 고통을 견디는 겁니다. 근육은 근섬유가 찢어지는 고통을 견디며 만들어 집니다.
2.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그동안 생각하거나 바라던 하나님이 아님을 경험할 때, 무엇이 달라지는가? 하나님을 버리는 가? 아니면 붕괴된 신념체계를 끝까지 고집부리는가? 예레미야는 이 양자가 아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고난과 고통을 길을 울면서 지납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레미야이 어깨에 손을 얹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예레미야 31:3)
3. 예레미야는 너무 울어서 눈이 짓물렀습니다. 그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피로와 의심과 조롱은 그의 몸과 마음과 감정을 극한으로 몰아갔습니다. 그의 글과 삶이 동일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예레미야 16:2), 가족과 이웃에게 배척을 받아야 했습니다(예레미야 12:6). 그러나 그는 이런 것들을 견딥니다. 눈물을 흘리며 견딥니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장엄한 글로 담아냈습니다.
4. 어제, 그가 ‘아나돗’ 출신인 것, 곧 이름없는 무명의 동네 출신인 것과, 아이라 말을 잘하지 못하는 것 등등이,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시고, 목적하신 것에 방해가 되거나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디프레션(우울증)과, 그의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도 일하셨습니다. 이렇게 어느것도 하나님의 일하심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5.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예레미야 4:1-2)
이 말씀은 앞선 예레미야 3:22-25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회개를 들으신 후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곧 회개하려거든 진실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진실된 회개는 가증한 우상을 버리고 요동치 아니함을 뜻합니다. 진실과 정의와 공의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도덕적인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높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명예입니다.
진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공평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의는 하나님 앞에 진실을 고백하고, 공평을 옳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취하는 바른 태도입니다.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한다’는 뜻은 죄인이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당신께 돌아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6.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예레미야 4:3-4a)
땅을 갈면 옥토가 됩니다. 옥토는 고난을 많이 당한 땅입니다. 땅을 가만히 두면 황무지가 됩니다. 땅에 씨앗을 뿌리려면 먼저 땅을 갈아야 합니다. ‘묵은 땅’, ‘가시덤불’은 사람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묵은 땅은 갈아야 하고, 가시덤불에는 파종하면 안됩니다. ‘갈고’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씨앗)을 뿌릴 수 있도록 옥토, 곧 고통을 견디는 마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7. 그런데 예레미야 4-6장은 유다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도 5장은 심판의 불가피성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 안에 예레미야의 탄식이 계속 등장합니다. 묵은 땅을 갈아야 하는 이유는 ‘옥토가 되기 위해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옥토가 되었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어떤 씨앗을 뿌리느냐’는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옥토가 되지도 못했고, 그곳에 씨를 뿌리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참된 복음을 증거하는 예레미야를 때리고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울었습니다.
8. 누가복음 8:5 이하에는 <네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가 나옵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있는 말씀 중에 하나 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길가, 바위, 가시떨기, 옥토에 초점을 둡니다. 그리고 ‘옥토가 되자!’고 다짐합니다. 이 비유는 이런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의 시작을 잘 보면 씨뿌리는 자가 씨를 뿌렸는데 네가지 땅에 골고루 떨어집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 대해서 제자들이 무슨 뜻이냐고 예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비유를 ‘하나님 나라의 비밀’로 설명해 주십니다. 다시말하면 이 비유를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장 정확한 이유와 목적이 예수님의 대답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누가 8:8)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좋은 땅이어야 듣는 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것 이상의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풀어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길 가, 바위, 가시떨기, 좋은 땅이 무엇인지 풀어주십니다. 그리고 ‘좋은 땅이 되라!’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우리가 힘을 주어 ‘옥토가 되자!’고 결심할 뿐입니다.
이 비유를 먹고 걸을 때 옥토가 되자!는 결심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옥토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시면 씨는 좋은 땅에만 떨어진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게 복음이 됩니다. 나같은 사람에게도 씨가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긴 자들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잠시 기쁨으로 받아도 시련이 오면 헌신짝처럼 버리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의 기운이 넘쳐흐르는 자들입니다.
9.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풀어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게 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함이라”(누가 8:10)라고 하시면서, 등불을 등경위에 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누가 8:17)
이 비유는 비밀인데 감추려고 하는 비밀이 아니라 드러내기 위해 감춘다는 아리송한 말씀입니다. 드러내기 위해 감춘다는 말씀은 영원한 비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비밀이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이 말씀의 클루가 고린도서에 나옵니다.
10.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의 그 뜻대로 형제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린도전서 15:35-38)
이 말씀은 부활에 대한 바울의 답변입니다. 지금 우리는 씨앗과 같은 형체입니다. 부활의 형제는 씨를 심어 꽃이나 열매를 보는 것 같이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씨를 보고 열매와 꽃을 알 수는 없고 애벌레를 보고 나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땅이 등장합니다. 그 땅에 씨가 떨어져 죽습니다. 길가요 가시떨기이고 바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조건은 아무리 씨를 받아도 결실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생명을 주어도 그것을 유지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 생명을 죽였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이 씨가 이스라엘에 뿌려졌습니다. 이 씨는 그곳에서 고난 받을 것이고, 무시당할 것입니다. 이 씨를 거절한 땅에서 예수님 배척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옥토에서 죽임을 받아 새생명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길가, 바위, 가시떨기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는 곳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 이스라엘의 희망없음 바로 그 자리에서 죽으십니다. 그리고 옥토가 아닌, 그 절망의 자리, 거기에서 부활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옥토에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골고다(해골), 죽음위에 세워졌습니다. 이게 우리의 소망이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확인하고 하나님과 합의해서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닙니다. 어느날 보니 우리 영혼에 생수가 흐릅니다. 우리 영혼이 꽃이 피었습니다. 분명히 나는 바위이고 가시떨기요 길가인데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무슨 일을 하셨을까? 내가 얻은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나님의 기적이 뭐지? 바로 나! 하나님의 사랑이 누구지? 바로 나! 그분의 사랑이 아니면 풀어낼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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