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예레미야 13-16장
1. ‘고쳐달라고 하지 말고 죽여 달라고 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이상을 꿈꾸지만, 현실은 너무 비참합니다. 고치고 고쳐도 우리 깊은 속에 있는 것에 대해서 답이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자기 중심의 인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신에게 조금 남은 선을 극대화합니다. 그들은 이름 모를 작은 동네 아나돗 출신의 예레미야의 소리를 듣기 싫어합니다. 그들은 자기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듣고 싶어합니다.
2. ‘그래? 네가 우리 보고 우상숭배한다고 그러는데, 하나님을 버렸다고 그러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예 버렸느냐?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아예 폐하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를 그렇게 형편없이 여기실 것 같으냐?’ 이것이 영적인 ‘자기기만’입니다. 자기기만은 내 심령이 죄에 대한 내성으로 완악해져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3. 예레미야 13장은 상징과 비유를 들어서 우리의 닫힌 귀와 아둔한 마음을 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예레미야의 몸 언어를 통해, 베띠를 이용한 상징을 통해 하나님의 진심을 전하십니다. 베띠를 사서 허리에 차라고 하시던 하나님이 그것을 풀어다가 유브라데 강가에 묻으라고 하십니다. 그대로 하니까 얼마 뒤 이제는 다시 그것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가보니 이미 띠가 썩어서 찰 수가 없습니다.
베띠의 상징을 들어서 너희들의 마음의 상태가 바로 그와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마음 가득히 차 있는 교만으로 너희의 심령이 부패해 있고, 그래서 너희도 내가 찰 수 없을 정도로 썩어 소용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이 본래 원하시는 것은 이런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예레미야 13:11)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예레미야 13:10)
5.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아니 귀에 거북해지면 알아듣기를 거절해 왔습니다. 말씀을 접하면 온몸으로 받아낸 것이 아니라 훑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말씀을 추리고 발췌해서 나의 사정에 편하도록 맞추어 왔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점점 귀가 안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외면과 거절이 이제는 들을 수 있는 능력의 상실을 불러 왔습니다. 그래서 내 삶에 말씀으로 말미암는, 살아 있는 말씀의 역사로 말미암는, 벅차오르는 감동도 같이 상실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듣고 싶어도 도통 귀가 먹어 들을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는 이렇게 동일 선상에 서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들어도 이것이 나의 말씀으로 역사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6.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말씀 앞에 멍한 모습으로 딴소리를 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포도주 가죽부대의 비유’입니다.(예레미야 13:12-14)
하나님은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가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을 능력을 상실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엉뚱한 소리를 합니까? 말의 의미는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아니 가죽부대에 포도주가 차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 왜 그걸 우리가 모르겠냐?’라고 말합니다.
술에 취해 서로를 칼로 쳐서 공동체가 산산조각 날것이라는 엄청난 말씀이 이 포도주 가죽부대 비유에 담겨 있음에도 이들은 전혀 알아챌 수 없습니다. 왕들도, 제사장들도, 선지자들도 예루살렘의 어떤 거민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렇게 모두가 함께 멸망합니다.
7.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시력과 청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나중은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닥쳤는고...”(예레미야 13:22)와 같은 한탄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못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시고 우리의 양심을 향해 호소하십니다. “너희는 들을 지어다, 귀를 기울일 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그가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예레미야 13:15)
8 왕도, 선지자도, 제사장도 모든 백성이 듣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멸망의 길을 치달을 때 한 사람만이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오직 예레미야 한사람만이 깨어서 하나님과 홀로 소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함께 시대의 아픔에, 동족의 미래를 위해 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 (예레미야 13:17) 민족의 참상을 볼 수 있는 눈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들려올 동포의 비명소리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로 말미암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마음을 눈물 삼아 통곡할 수 있는 눈물의 선지자로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9. 이제 다시 ‘이사야’ 이야기를 해봅니다. 이스라엘의 고난과 멸망에 대한 이사야의 관점을 예레미야의 관점과 비교해 보십시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는가 보라.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이사야 40:26, 28)
10.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참담한 모습과 하나님의 창조를 동격으로 봅니다. 고난과 영광이 동격입니다. 이사야의 눈에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여기 계십니다’ 이스라엘의 유배생활은 혼돈하고 공허했지만, 그들이 깨닫지 못했을 뿐 하나님은 ‘수면위에 운행하고’ 계셨습니다.(창세기 1:2)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보이는 곳마다 창조의 증거가 있습니다.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 21-24장 (0) | 2020.08.04 |
---|---|
예레미야 17-20장 (0) | 2020.07.28 |
예레미야 9-12장 (0) | 2020.07.28 |
예레미야 5-8장 (0) | 2020.07.22 |
예레미야 1-4장 (0) | 2020.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