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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

예레미야 21-24장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예레미야 21-24장

1. 인간은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살다가, 땅에서 죽습니다. 사는 것은 땅을 딛고 있음이고, 죽는 것은 발을 땅에 딛고 있을 수 없음입니다. 땅은 인간의 질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땅을 먹고 삽니다.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 만지는 것들은 모두 땅에서 나온 것으로 결국 땅으로 돌아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땅에 대한 갈구가 있습니다. 인간은 땅에 터를 잡음으로 생을 유지하고, 아주 작은 터에 자신의 생을 마감합니다.

2. 그렇기에 이 세상의 모든 통치자들은 땅의 지배권을 주장했습니다. 통치는 땅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땅을 이끔으로 땅을 본질로 하는 인간을 이끌어 온 것이 땅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땅의 상징성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한 것인데, 그 땅은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그는 헷 족속 에브론에게서 막벨라 굴이 딸린 밭을 구입함으로써 자신이 죽어서도 있어야 할 곳이 가나안 땅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3. 유랑객에게 죽어 묻히는 장소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였겠습니까? 죽은 자리가 곧 매장지요, 죽은 땅이 곧 무덤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生)과 사(死) 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생(生)과 사(死) 역시 약속의 땅 위에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고 소망했습니다. 그 땅, 가나안이라는 물리적인 땅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상징했던 것입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우리나라의 곳곳에 있는 왕릉의 화려함은 그들의 땅에 대한 통치의 상징입니다. 다만 그들은 세상 속에서의 통치에 대한 상징을 세웠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4. 예레미야 22장에는 유다 땅의 세 왕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세명 모두가 자신이 죽을 땅을 선택하지 못한 왕들이라는 것입니다. 살룸 왕이라 칭하는 여호아하스, 엘리아김이라고도 하는 여호야김, 그리고 고니야라고도 불리우는 여호야긴입니다. 그들은 유다가 멸망할 때 왕의 자리를 지켰던 자들입니다. 왕의 통치는 그 땅의 이끌고 다스림을 의미한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왕이 자신의 몸을 눕힐 땅을 선택하지 못했다는 것은 곧 그의 통치가 무력했음을 상징합니다.
5. 살룸 왕을 향해 예레미야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잡혀 간 곳에서 그가 거기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예레미야 22:12) 살룸 왕은 애굽 왕 느고(Necho)에 의해 폐위되어 애굽 땅으로 잡혀가 그 곳에서 생을 마칩니다. 애굽은 자신이 묻혀야 할 조국 땅을 볼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여호야김 왕을 향해 예레미야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예레미야 22:19) 왕이 죽었는데 죽은 나귀 취급을 받아 끌려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내동댕이쳐져 묻히는 수치의 땅이 그의 것이었습니다.
고니야 왕을 향해 예레미야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이 사람 고니야는 천하고 깨진 그릇이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의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갔는고”(예레미야 22:28) 고니야는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 잡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가 다시는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6. 이렇게 땅을 잃어버린 자들을 지켜보아야 하는 예레미야의 슬픔이 들려옵니다.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예레미야 22:29)

선지자의 사무침과, 안타까움과, 절규가 세 번이나 땅을 부르는 소리에서 터져나옵니다. 어찌하여 존귀한 왕들이 땅을 잃어버린 자들이 되어야만 했습니까?

7. 예레미야 22:3절 말씀에 집약적으로 그 이유가 설명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의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예레미야 22:3)

여기 눈에 띄는 두 단어가 ‘정의’와 ‘공의’입니다. 히브리어로 ‘정의’는 ‘미쉬팟’이라 하고 ‘공의’는 ‘츠다카’라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통치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정의와 공의를 법이나 도덕적인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정의와 공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격(class), 수준입니다. 그리고 정의와 공의는 추구해야 할 이상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 적용되는 ‘실력’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자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하나님이 그 나라의 백성을 실력자로 만드시는 역사입니다.

8. 그런데 하나님은 실력을 갖춘 자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자녀로 삼으시고(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실력자로 만드시는 것이 ‘구속’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는 방법은 강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외적 힘에 의해서 그 나라를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가치관으로 그 나라를 살아내는 실력입니다. 그런에 이 하나님의 사랑에는 ‘거친 손’과 ‘부드러운 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칠게 인도하시고, 부드럽게 달래고 어루만져주시기도 합니다.

9.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법, 인간의 법과 도덕을 넘어선 가치인 정의와 공의가 유다 왕의 집과 땅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살룸 왕은 ‘잡혀간 곳’(v.12)에서, 여호야김 왕은 ‘예루살렘 문 밖’(v.19)에서, 고니야 왕은 ‘알지 못하는 땅’(v.28)에서 죽어야만 했습니다.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예레미야 22:29) 어찌 땅이 여호와의 말을 듣지 않았겠습니까? 그 땅의 주인이라고 생각한 존재, 그 땅을 탐욕으로 통치한 존재, 그 존재, 바로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미쉬팟’과 ‘츠다카’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그 나라를 살아낼 ‘실력’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생(生)과 사(死)의 터전을 잃고, 그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10.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사는 백성이라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살아낼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 실력은 경제를 더 낫게 하는 실력이나, 세력과 힘으로 통치하는 실력도 아닌, 백성의 참된 ‘실력’은 땅에 대한 ‘바른 가치관’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이 땅은 다윗의 참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들어오는 집이 될 것입니다(예레미야 22:4).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예레미야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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