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걷다 Mosaic Ministry, 레위기9-12장
1. 하나님은 모세의 대언자로 아론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패턴이 금송아지 사건에서 깨집니다. 레위기 9장은 아론이 첫제사를 집례하는 장면으로 실패했던 아론이 다시 회복되는 장면입니다. 아론의 제사를 통해서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남으로 아론은 완전히 회복됩니다. 구속사적으로 ‘제사장의 직무’인 아론의 역할은 ‘바르게 듣고’, ‘바르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2. 설교자의 자리에서 ‘바르게 듣고 바르게 전달하는 문제’는 평생 동안 씨름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말씀은 인격자 이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안에 지, 정, 의가 들어있습니다. 지적인 이해나 동의로는 독재자의 교서밖에 되지 않습니다. 바르게 듣고 바르게 전달하는 방법은 텍스트 속에 담겨 있는 ‘영이신’ 하나님의 감정과,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의지를 이해하고 전달해야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아느냐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고 그분의 뜻에 자신의 삶을 맞추어가는 것입니다.
3. 레위기 10장은 나답과 아비후가 벌을 받아 죽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아론은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첫째와 둘째가 나답과 아비후입니다(셋째는 엘르아살, 막내는 이다말, 출애굽기 6:23). 그들이 죽은 이유가 곧 바로 설명되어있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레위기 10:1)
4. 이 사건은 ‘구원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메세지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방법 ‘밖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빨리, 혹은 늦게, 혹은 너무 늦게, 결국은 인정하게 됩니다. 인간은 이상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상을 추구하다가 이상하게 됩니다. 10명이 모이면 10개의 이상이 있습니다. 100명이 모이면 100개의 이상이 있는 겁니다. 인간의 이상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다양성 속에서 일치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앞에 모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시’입니다. 계시는 목적한 바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의 문제, 곧 방향감각의 문제입니다.
5. 내가 속한 공동체가 왜 완벽하지 못한 줄 아십니까? 그 안에 불완전한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문에서 ‘이 세상의 문제는 무엇인가?’라는 공개 질문을 했을 때, G. K. 체스터턴은 아주 짧막한 답신을 다음과 같이 보냈습니다.
“담당자에게. 그건 바로 나 입니다. – G. K. 체스터턴 드림”
6. 레위기 11장은 ‘음식법’과 ‘사체접촉’에 관련된 규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먹는 것’에 관심이 많은 우리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부분인데, 그 표현과 상징의 어려움으로, 얘기는 무성하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세는 동물들을 크게 네가지 부류로 나누는데, 땅의 짐승, 물고기, 새, 곤충입니다. 땅의 짐승 중에 먹을 수 있는 것은 두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굽이 갈라져있어야 하고, 되새김질해야 합니다. 소, 양, 염소, 사슴 이런 짐승들입니다. 돼지는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굽은 갈라져있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중에서는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는 것은 먹어도 됩니다. 새들에 대해서는 먹지 못하는 것만 기록했는데, 이 새들의 공통점은 육식을 하고, 물에 다이빙을 해서 먹이를 구하는 특징 그리고 사막이나 동굴에 거하는 새들을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곤충은 뛰는 다리가 있는 것만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7.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런 규례를 주셨을까? 이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들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아무런 이유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이교도의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여기 나오는 부정한 짐승들이 이교도에서 사용하는 제물들이기 때문이고, 그에 대해서 ‘구별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가끔 음식을 연구하는 분들은 우리의 건강과 위생을 위해서 구분하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굽이 갈라진 것을 구약과 신약으로 해석하는 알레고리적 해석도 있습니다. 이러한 적용들은 ‘부분적으로 가능한’ 적용이지만, 음식법와 사체접촉법이 주는 ‘메세지’는 아닙니다.
8. 이 음식물 규례와 사체접촉의 규례는 아주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리’, ‘구별’입니다. 이 분리와 구별이 ‘거룩’의 뜻임을 기억하시죠?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매우 난처하게 생각하고, 거부감을 느꼈던 이유는 ‘이방인’과 구별된 이스라엘의 ‘거룩한 구분’에 대한 율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결법이 규정한 부정한 음식을 펼쳐놓으시고 베드로에게 그것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게 한 것을 속되다고 하지말라’고 하셨습니다. 음식법을 폐하시고 이방인을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사랑과 연합의 교제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9. 그러므로 음식법은 ‘거룩’에 대한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방인과 구별하신 것입니다. 결국 음식법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에 장벽이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장벽을 허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구별된’것이 아니라, 이방인보다 더 못하게 되었습니다. 민수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진중에 있는 부정을 제거하라고 명하십니다. 진중 부정제거의 대상은 1)문둥병자 2)유출병자 3)주검으로 부정케 된자입니다. 문둥병은 감각이 없는 병으로 죄에 대해 짱아치가 된 것을 뜻하고, 유출병은 몸에 있는 더러운 피나 고름이 나오는 병으로 마음의 쓴뿌리를 입을 통해서 뱉어내는 병이며, 주검으로 부정케 된자는, 결국 죽음으로 끝날 것, 곧 영원한 나라에 가져갈 수 없는 것, 곧 세속적 가치에 기반을 둔 것을 의미합니다.
10. 그러므로 레위기의 음식법과 사체접촉법이 가지는 의미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제사장된 나라로서의 구별된 삶을 살라는 메세지이며, 그렇게 거룩한 백성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철폐된 장벽, 곧 이방인들, 세상에 살면서, 구별됨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라는 ‘메세지’입니다. 여기에 한가지를 더하면, ‘음식’은 매일 먹는 것으로 ‘일상성’이 있습니다. 곧 구별됨이 적용되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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