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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민수기 13-16장

말씀을 걷다 Mosaic Ministry, 민수기 13-16장

1.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그들의 문제를 처리하시는 기록입니다. 민수기 11장은 <육신의 탐욕>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민수기 12장은 <그릇된 편견과 판단>에 대해서 말씀하고, 13장은<불신앙>의 문제를 다루고, 14장은 <불순종>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16장에는 당을 지어 모세를 대적한 고라자손의 <반역> 대한 이야기와 민수기 20장에는 <므리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1장에는 <불뱀 사건>이 나타나 있는데, 이 모든 사건사건마다 우리 육신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광야라는 신앙여정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들을 처리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민수기에 보면 죽고 죽고 또 죽습니다. 이렇게 죽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도를 상징합니다.

2. 민수기 13장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 깊숙히 뿌리박힌 <불신앙>의 문제를 처리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민수기 13:1-2)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땅입니다. 이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미 하나님이 주셨는데 탐지를 해야하는가? 여기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라는 말씀의 뜻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한 것이 무엇인지 먼저 보게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은 그 땅을 보여주시면서 “그 땅이 네것이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나안 땅을 보여주시면서, 그것은 본 이스라엘의 ‘속에 있는 무엇이 드러나는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본 백성들이 소망과 기대를 품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3.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바란 광야 가네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민수기 13:25-27) 그들이 가나안 정탐을 마치고 보고를 하는데 그 땅의 과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과일은 포도와 석류와 무화과였는데,기쁨과 평화와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들,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4.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큰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민수기 13:28) However… 그러나,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기 ‘그러나’는 불신의 언어입니다. 잘 나가다가 ‘그러나’로 돌아오면 미끌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나’라는 단어를 쓰면 그 뒤에는 그러나에 합당한 언어가 나오고, 그 언어가 신앙의 태도를 결정하고, 신앙의 운명을 결정하게 됩니다.

민수기 14:11에 가서 보시겠습니다. 여기에 ‘그러나’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수기 14:11)

5. 하나님께서는 ‘그러나’를 ‘하나님을 멸시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이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오늘 성도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도전은 ‘믿음’의 도전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삽니다. 종교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삽니다.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민수기 14:22)

‘열 번이나 나를 시험했다’는 말씀은 ‘계속해서 불신했다’는 말씀입니다.민수기에서는 계속해서 불신앙의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민수기 13:30절에 가서 보시겠습니다.

6.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수기 13:30-33)

첫번째 불신의 언어는 ‘그러나’입니다. 이제 두번째 불신의 언어가 나타나는 데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이것이 불신의 언어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크기의 싸움이 아니라 믿음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안고 삽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의 죄보다 크고 강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보다 큽니다.

7.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는 말씀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무엇과 무엇을 비교합니까? 그들과 우리를 비교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자꾸 나, 나, 나 하니까 내가 약하면 절망하고, 내가 강한 것 같으면 교만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안에 살면서 지금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바로 듀얼리스틱 컴플렉스(dual complex)입니다.

은 문자대로 하면 ‘이원론’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앞으로도 계속 나타나는 가장 고질적인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바로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이 커보이고, 충만하고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권세,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 하나님의 보장과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을 두려워하고, 환경에 두려워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8. 신앙은 크기의 싸움이 아닙니다. 이상하게 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작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을 몇 번 보았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사실 작은 교회 다니시는 분들이 오히려 더 훌륭한 신앙일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 우리는 모두 연약하지 않나요? 다윗이 왜 골리앗을 이겼습니까? 성경이 다윗을 통해서 무엇을 드러냅니까? 크기의 싸움이 아니라는 메세지입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클지라도,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커도, 우리의 상황과 환경이 아무리 크게보여도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나로 인한 원인이 아님을 통해서 오직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9. 계속해서 32절을 보면, 세번째 불신의 언어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민수기 13:32)

세번째로, <악평>이라는 단어가 불신의 언어입니다. 불신의 마음이 가득하면 모든 상황과 사건을 바로볼때 악평합니다. 악평은 부정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역경이나, 조건 속에서 호평의 언어가 나옵니다. 긍정적인 것입니다. 불신의 마음에서는 악평이 나오고 믿음의 마음에서는 호평이 나옵니다.

여러분에게 아낙자손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자리와 환경이 철통같은 성읍으로 보이십니까? 가나안의 싸움은 그 거인과 그 힘의 싸움이 아닙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문제가 크고, 죄가 중해도 하나님은 더 크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골리앗이 크지요? 그래서 이기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돌을 던질 때 어떤 표적을 맞추기가 쉽습니까? 큰 표적이 쉽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이 돌을 던질 때 맞추기가 아주 쉬웠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눈이라고 하는데, 어떤 눈인가?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10. 이제 33절을 보면 네번째 불신의 용어가 나타납니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수기 13:33)

네번째 나타난 불신의 언어는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입니다. 바로 자기연민입니다. 자기를 생각하면서 자기가 너무 불쌍해 보이는 것입니다.한번 조용히 스스로에게 말해 주십시오.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하나님의 자녀인데!”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기준이 아닙니다. 우울하게 보면 우울하고, 값싸게 보면 값싸게 보이는 것이 인간의 눈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중요하다고 하시고, 아름답다고 하시고, 존귀하다고 하십니다.

11. 정탐꾼들은 자기 자신을 메뚜기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오기까지 세단계를 거쳤습니다. 1)그러나, 2)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다! 3)악평을 거쳐서, 4)메뚜기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의 결과로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자기가 내리는 것입니다. 여기 메뚜기 컴플렉스는 자기보다 문제가 더 커보이는 것입니다. So many Christians has grasshopper complex.

옛날에 ‘내가 나를 모르는데, 니가 나를 알겠느냐~’ 뭐 이런 노래가 있었습니다. 나도 나를 모르고, 타인도 나를 몰라도,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나를 아십니다. 내 본질을 아시고, 내 뼈속까지의 고민과 문제를 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메뚜기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 자녀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중요하고, 나는 아름답고, 나는 존귀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여러분을 못났다고 하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러분은 못나지 않았습니다. 저를 보시면 못생겼어도 얼마나 아름답게 못생겼는지 모릅니다. 조화롭고 신비롭게 못생겼습니다.

‘조화롭고! 신비하도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불신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의 죄가 그리스도의 능력보다 크게 느껴집니다. 불신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의 문제가 그리스도보다 더 크게 느껴집니다.

12. 오늘 우리는 네가지 불신의 언어를 상고했습니다. 1)그러나 2)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3)악평하여 가로되 4)메뚜기 컴플렉스입니다. 그 결과가 민수기 14:28에 나타납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민수기 14:28-30)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이 들린대로 그들에게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계속해서 이스라엘은 죽습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는 그 날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쳐서 그 사십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네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리라 하셨다 하라” (민수기 14:33-34)

왜 사십년을 광야에서 지내야 하는지 아시겠지요? 이제 하나님은 사십일을 사십년으로해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을 죽이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죽이십니까? 살리시기 위해서 죽이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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