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신10:18)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14:29)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신16:14)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신24:21)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신26:12)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시146:9)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렘7:6)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슥7:10)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약1:27)
성경에서는 일관되게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돌보라 합니다.
특히 율법을 기록한 신명기에서 더욱 그리합니다.
신명기를 기록한 시대의 이스라엘은 400년 이집트 노예 생활과 40년 광야 생활을 경험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던 세대입니다.
나그네의 삶을 사는 이스라엘에 주는 말씀이기에 나그네를 돌보라는 메세지는 이스라엘에게, 자기 땅 없이 나그네처럼 떠돌던 광야를 기억하라 정도의 메세지로 생각합니다.
근데 왜 하필 나그네 말고, 과부와 고아, 궁핍한 사람, 레위인 같은 이들을 콕 집어 이야기한 것일까요?
이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의 분깃이 없다는 것입니다.
레위지파, 나그네, 고아와 과부는
'땅'이라는 생산수단이 없는 이들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배고플 수 밖에 없는 자들의 대표자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권리와 아픔을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누구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럴 이유도 그럴만한 영향력도 없으니까요.
왜 사람들이 자기 집을 가지고 싶어하냐면, 세들어 사는 삶은 집주인에게 당당하고 하고 싶은 말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 말로 표현해보자면, '을' 입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상가교회들이 자신들의 권리와 아픔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자기 건물을 몇 개씩 가지고 있는 큰 대형교회들은 그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어찌하면 더 좋은 자리로 더 넓은 곳으로 이사할까 고민하지 옆 골목에 작은 상가교회 따위
중요하지 않고, 창피할 뿐이고 실패자처럼 생각할 뿐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교회는 닫혀있습니다.
세상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내 품 안에 작은 나그네 같은 여기저기 떠도는 작은 교회들마저 돌아보지 않는데 세상이 보일까요?
작은 교회 안에서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연 그들의 마음까지 돌아볼 여유가 있을까요?
성경은 반복해서 여러번 강조합니다.
나그네를 보호하라,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
레위지파를 돌보라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말라
이것이 경건이다.
왜 예수님이 세리를 그렇게 챙겼는지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성전 끄트머리에서 머리를 감히 들지도 못하고 속으로 삭히는 세리를 생각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아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18:13)
예수님께 나아오지 못해, 뽕나무 위에서 쳐다보는게 다였던 세리 삭개오에게 다가온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습니다.
성전세가 없어서 성전에 들어가지고 못해서 자기가 가진 전 재산인 두 렙돈을 헌금하고 돌아서는 과부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눅21:2-3)
감히 고쳐달라 말할 수 없어 예수님의 옷자락만 스치던 혈루병 걸린 여인의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막5:27-28)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미친사람처럼 부르짖는 소경을 향해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 다그칩니다.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눅19:38-39)
하나님을 알고 제사드리는데, 다른 민족의 혈통이 섞였다고 차별받고 그럼에도 한마디 하지 못하는 사마리아 인들을 향한 예수님 끊임없고 일관된 메세지가 보입니다.
우리는 이 구약과 신약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일관된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 더 알았습니다.
목소리가 잠긴 자, 자신의 권리를 말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 주변에 목소리가 잠긴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무목사 메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