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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2024 말씀을 걷다

2024 말씀을 걷다 창세기 39-42장


창세기 39-42장

요셉을 포함한 믿음의 조상들 그리고 성경의 위인들을 볼 때 조심해야 할 것은 그들을 영웅화 하는 것이다. 영웅심리는 대리만족으로 자신의 참여가 없이 타인의 성취를 통해서 만족감을 느끼는 심리적인 경험이다. 현실의 자리에서 어려운 일을 영웅은 이루어 낸다. 이런 심리는 힘든 삶의 자리에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실제 삶의 자리는 여전히 만만치 않다.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동일시, 전이, 투사, 승화 등의 용어로 일반적인 대상행동을 설명했다.  

우리가 요셉을 볼 때, 결과적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가족을 구하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성립케 하는 큰 공헌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본성상 [그에게] 남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남다른 신앙에 초점을 두고 드러내어 격려하곤 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대리만족의 경향성이 크지 실제적으로 격려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영웅을 좋아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웅이 아니며, 영웅적인 사람들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결국 사람이 가진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성경은 요셉에 대해서 그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말씀한다(창세기 39:2). 이어서 3절을 보면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고 한다. -> 개인의 신앙이 남에게 까지 분명히 보이는 그리고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요셉의 복됨이 -> 4절을 보면,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치니라”라고 해서 앞에 있었던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대로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신다는 약속이 요셉에게 그대로 실현되는 것과, 이 주인이 요셉이 믿는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한 지, 요셉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분명한 것이 확인되고 있다. -> 이런 차원에서 요셉이 믿는 하나님을 누구나 인정할 만큼 요셉은 신앙인이다. 이런 요셉에 대해서 시편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 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 하였도다” (시편 105:16-19)

이 말씀은 요셉의 고난을 신앙으로 극복해 낸 근거 구절로 인용되는 말씀이다. 그 발이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는 말은 노예가 붙잡혀 고생하는 모습으로 육체적인 고난을 당했다는 뜻 만이 아니라 -> 이 고난의 깊이는 요셉 자신이 신앙적으로도 이게 뭔가? 하는 큰 낙심의 자리까지 갔었다는 뜻이며, 설명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고난과 고통을 요셉이 당했다는 뜻이다. -> 그러나 앞에서 언급 했듯이 [하나님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했다]는 말씀이 마치 후렴 구절 같이 계속 등장한다. -> 이런 요셉의 모습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짐으로 기대하는 형통과 성경이 말씀하는 형통에 차이가 난다.  

요셉은 형들에게 노예로 팔린다. 무고를 당하고 감옥에 갇힌다. 자연인의 관점에서 이런 요셉의 모습은 형통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은 요셉을 판 형들이 다 벼락에 맞고 쫄딱 망해야 하고 요셉은 잘 먹고 잘살아야 한다. 그러나 요셉은 노예로 팔려간다. 노예로 잘되는 것 같은 데 다시 감옥에 간다. 성경은 이런 것들을 싸잡아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한다. -> 바로 이런 부분이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우리는 신앙에 대해서 -> 우리가 가진 진심의 고백이 하나님께 드려져서, 우리의 고백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심으로 남다른 형통함,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세상에서 승승장구함을 주셔서 하는 일마다 잘되고, 세상 사람들 앞에 면목이 서서 예수님을 믿으니까 하는 일마다 잘된다는 보상으로 생각한다. -> 그러나 뜻 밖에 성경은 그런 식의 약속이 없다. 성경이 시종일관되게 신자에게 약속하는 신자의 모습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다.

요셉의 사건은 신자가 이미 확보한 구원과 그리고 가야할 결국의 자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작하시고 이루고 계시고 완성하실 구원에 대한 설명이다. 곧 하나님이 목적하신 곳으로 가는 현실이, 말씀에 기록된 바와 같이, ->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는 과정을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이 신자로서 완성을 위한 과정은 환난으로 준비되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것이 우리의 기대와 다르고 뜻 밖의 문제가 된다. 요셉에게 증거된 것, 그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 왜일까? 환란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 환난은 우리가 무슨 뜻인지 안다. 고단, 곤고, 시련, 난관을 말한다. 그리고 환난이 인내를 만든다. 그런데 이 인내는 [경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경험이 우리를 [성숙]에 이르게 한다. 영어 번역에서 이 연단을 성숙(mature)이라고 하고, 증거(proof)라고 번역한 곳도 있다. -> 무슨 뜻인가? 우리의 신앙이 처음에는 사실에 대한 이해와 공감과 진심 어린 감격으로 이루어 진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힘이나 능력으로 결과되기를 원한다. -> 그러나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이 믿음이 이해와 동의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목적하신 것으로 채워 지기를 바라신다.

이것은 내가 어떤 능력을 가졌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의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구원의 완성은 그 자녀가 가지는 실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 자녀의 자녀 된 됨됨이이다. -> 그런데 이  됨됨이가 환란으로만 만들어 진다. 능력은 주어지고 타고 날 수 있다. 그러나 됨됨이는 연단이 필요하다. 내가 소유한 믿음이 실력을 가지는 것은 됨됨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밖으로 증명 받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무엇이 쌓으시는 가를 보아야 한다. -> 우리가 누구이든지 우리에게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 있다. 그것이 쌓이는 것이 신앙이다. ->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 됨의 수준으로 만드시는 데, 모든 성도, 누구에게도 차별이 없이 당신이 목적하신 것을 부족함 없이, 아주 열심이 이루고 계신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고, 기독교 신앙이며, 현실이다.

[기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The LORD was with Joseph and he prospered. (창세기 39:2)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가 충돌하는 삶의 자리에서 아버지 나라의 제사장으로, 그 나라의 대사로, 주님의 향기를 머금은 자로, 그 나라로 살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범사에 바르고 건강한 관점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