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종종 가나안을 천국에 비유한다. 애굽이 구원을 받기 전 이라면, 홍해를 건너는 것은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는 것이고, 광야는 현세를 살아가는 삶이요, 요단을 건너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며칠 후 며칠 후 요단 강 건너가 만나리”(찬송 606)라고 한다. 그런데 이 찬송은 오역이다. 이 시를 작사한 원문은 “In the Sweet By-and-By, we shall meet on that beautiful shore” -> “머잖아 우리는 아름다운 강가에서 만나리”라는 뜻이다.
가나안은 천국의 모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하는 신자된 모습의 모형]이다. -> 이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전쟁을 한다. 이 전쟁을 문자적인 이해로 땅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치관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싸움이다.
가나안 [정복]에 대한 오해로 인해서 파생되는 부작용은 교회나 선교 등 신앙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드러나고 있다. 사람들은 선교를 마치 땅을 정복하는 것처럼 이해한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모습에서 땅을 밟으면서 돌고, 돌며, 돌아버리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그들이 여리고를 돌고 돈 것은 돌고 돌면 무너진다는 뜻이 아니다. 여리고를 도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가나안은 피안의 세계를 보여주는 천국의 모습이 아니다. 히브리서 3-4장을 보면, 가나안은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현재]이다. 이 현재는 성도들이 [믿음]과 [순종]으로 점령하고 정복해야 할 땅인 것이다.
이 [땅]은 공간적 개념이면서 동시에 [영적]이다. 곧 우리가 사는 [삶의 자리]는 공간이면서 영적인 곳이다. 바울은 이곳에서 영적인 전쟁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에베소서 6장). 이렇게 가나안은 피안의 세계를 동경하는 현실 도피적 세상이 아니다
여호수아서의 전반부의 중요한 주제는 [진멸]이다. ‘가나안 족속을 멸절하라’는 말씀은 그들과 섞이지 말라는 뜻으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은 함께 할 수 없음을 상징한다.
여호수아의 후반부에 기록된 중요한 주제는 [땅의 분배]이다. 그런데 여호수아 13장에 [정복하지 못한 땅]이 나온다. 그렇다면 전쟁이 끝나면 안되는데 전쟁이 끝났다. 여호수아는 전쟁의 끝을 선언하고, 얻은 땅에 대해서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기업으로 주었다.
그런데 여호수아 13장에가면,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여호수아 13:1상) 라고 하셨다. ‘얻은 것’과 ‘얻을 것’은 다르다.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셨는데 아직 얻을 땅이 남아있다. 실제로 보면, 이 땅은 [많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땅이 결국 [많이]가 된다.
그들이 아직 점령하지 못한 땅은 가사, 가드, 아스돗의 약간이다(여호수아 11:21-22). 가나안 전체를 볼 때 1%이다. 그리고 이 지역은 지중해 변방의 작은 일부이다. 여호수아는 이 부분을 우습게 생각했다. 어떤 위협도 되지 않는, 그래서 전쟁의 종료를 선언해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라고 하셨다. 1%를 하나님은 많이 남아 있다고 하셨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깊은 생각을 요구한다. ‘99:1’은 누가 보아도 99가 압도적이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실수는 이 가나안 전쟁을 [힘의 전쟁]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나안 정복이 군사력과 힘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요단강을 건널 때부터 확인했다. 그런데 전쟁을 하다 보니 정복지가 늘어나고, 요단을 건너던, 길갈로 돌아갔던 [초심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1%를 가볍게 여기고 남겨둔 채 전쟁의 종료를 선언해 버린다. 그래서 가나안 전쟁은 ‘순종’의 싸움인데, 불순종이 되어버렸다.이러한 패턴은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되어버린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에게 앞으로도 계속 [진멸하라]고 하신다. 죽여야 사는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1%를 죽이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은 400년동안 침묵으로 메시지를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99%+1%=100%를 십자가에서 죽이셨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3:25)
[도말한다. blots out)는 말은 [완전히 진멸하는 것]을 뜻한다. 결국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루셨다. 신앙공동체는 자신이 가진 ‘힘’이나 ‘세력’으로 일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시마다 때마다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큰 것으로 우쭐대지 않고, 작은 것으로 기죽을 필요가 없다. 신앙공동체는 ‘순종’을 통해 하나님이 약속하신(미래완료) 기업을 정복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들이시라도 고난. 을 통해 순종함을 배우셨음을 기억하자.
가드와 가사와 아스돗의 ‘약간(1%)…, 가사에서 삼손을 무너뜨린 들릴라가 나온다. 가드에서는 골리앗이 일어난다. 다곤의 신상 앞에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겨 버린다. 그것이 아스돗이다. 1%가 이스라엘을 뒤흔들어버리는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세 지역에서 이스라엘 역사의 씻어낼 수 없는 수치가 드러났다.
[기도]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 하니라. Judah could not dislodge the Jebusites, who were living in Jerusalem; to this day the Jebusites live there with the people of Judah. (여호수아 15:63)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가 서로 함께 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고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옵소서. 세상의 힘이 크고 두려워 보여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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