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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2024 말씀을 걷다

말씀을 걷다 사사기 9-11장

사사기 6장부터 길게 이어지는 기드온의 이야기는 그의 소심한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또 악을 행했다. 하나님은 저주의 축복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 족속에게 넘겨준다.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신다(사사기 6:1-24).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실 때 그는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다. 이 모습은 기드온이 어떤 상황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드러내는 그림 언어이다.
 
밀은 곡식을 타작하는 틀에서 타작을 해야 한다. 그런데 기드온은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다(사사기 6:11). 포도주는 정교하게 정제해야 하기 때문에 틀이 작다. 그러므로 밀은 넓은 마당에서 타작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밀을 작은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는 기드온의 모습은 몰래 숨어서 타작하는 모습이다. 그 이유는 미디안 족속이 이스라엘의 토지 소산을 약탈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심한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부른다(사사기 6:12). [큰 용사여]라고 부르신 것은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부르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소심한 놈아’라는 뜻도 분명히 품고 있다. 기드온의 응답은 역시 소심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미디안에 넘겨주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불평하면서 그 스스로에 대해서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사사기 6:15)라고 말하며 매우 가난한 자화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표징을 계속 요구한다(사사기 6:17).
 
그 중에 아주 찌질한 요구가 있다.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고 이슬을 내려 주시는데 양털에만 내리고 주변 땅이 마르면 믿겠다고 한다. ‘그대로 된지라’(사사기 6:38)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로 양털만 마르고 주변에만 이슬을 내려 달라고 한다(사사기 6:39). 이번에도 하나님이 그대로 해 주신다.
 
그리고 삼백 명을 추리는 유명한 이야기(기드온과 삼백 용사)가 나오고, 전쟁에 큰 승리를 한다. 그런데 그들의 무기는 놀랍게도 칼과 창이 아니었고, 항아리를 깨고, 횃불을 들고, 나팔 부는 것으로 승리한다(사사기 7:15-23). 이렇게 소심하고, 작은 수의 군사로 전쟁에서 이기는 모습은 가나안 전쟁이 무엇인지를 품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이 싸움은 힘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싸움이다.
 
그런데 큰 승리가 큰 유혹을 불러왔다. “그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 (사사기 8:22) 그러자 기드온은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사사기 8:23)고 말한다. 하지만 이어서 나오는 사사기의 기록은 기드온이 실제적으로 왕의 권력과 지위를 가지는 내용이다. 그 중에서 기드온은 금으로 에봇을 만든다. 이에 대해서 사사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 (사사기 8:27)
 
에봇은 제사장의 의복이다. 그가 에봇을 만들었다는 것은 정치권력 뿐만이 아니라 제사장적 권위까지 가진 것을 뜻한다. 상기한 말씀에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라는 기록의 뜻은 미디안이라는 외적인 공격이 아닌 그들 안의 마음의 부패를 뜻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패역의 정체를 그들의 내면세계에 대한 고발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패역의 상징적인 존재로 사사기 9장에서 아비멜렉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기드온은 많은 처첩을 두었고 아들만 칠십 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아비멜렉은 세겜에 거하는 첩의 아들이었다(사사기 8:31).
 
그런데 세겜이 있는 사람들이 아비멜렉과 결탁해서 기드온의 아들들을 다 죽인다. 그런데 그 많은 아들 중에서 요담이라는 아들 한 명이 살아남게 된다. 이 요담이 아비멜렉과 세겜사람들을 저주하는 내용이 나오고, 그 저주 대로 아비멜렉과 세겜사람들이 서로 다투면서 서로 죽는 내용이 사사기 9장이다.
 
아비멜렉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기드온이 왕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이름은 기드온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드온은 자기와 자기 아들은 왕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기드온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사사기 8:23)라고 말했다. 그리고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고 했다. 그러나 세겜 백성들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다. 곧 세겜과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를 거부하는 삶을 상징한다. 이 사건이 유명한 요담의 비유의 배경이다.
 
나무들이 감람 나무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감람나무가 자기는 왕이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기름을 내는 것이 자기의 부르심 이라고 한다. 나무들은 무화과 나무에게 찾아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한다. 그러자 무화과 나무는 자신은 단것과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 본분이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나무들은 포도 나무에게 찾아갔다.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내는 것이 자기의 본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무들은 가시나무를 찾아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했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사사기 9:15)
 
동물에 비해서 나무는 자기를 보호할 방어력이 없다. 그런데 생태계를 보면 식물이 훨씬 더 무성하다. 거기에는 중요한 원리와 이유가 있다. 식물의 방어력은 자기 자신의 ‘존재가치’에 있다. 감람나무는 기름을 내는 것이 자기 가치가 있다. 무화과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내는 것에 자기 가치가 있다. 포도나무는 포도를 내는 것으로 가치가 있다. 이렇게 그들이 만들어내는 가치가 방어력이 된다. 그 식물을 없애면 모두의 손해이기 때문이다.
 
요담의 비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재가치가 무엇인가? 를 말해 준다. 아직도 사람들은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헤메며 찾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인생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말씀해 주신다. 사람은 존귀하며,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존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고, 이렇게 신의 성품에 동참 동행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번
 
어떤 것이라도 본인이 누리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는 자녀가 모른 채로 놔두지 않는다. 그래서 양육하신다. 환경을 주시고, 상황을 주시고, 연단하시고, 가르치신다. 이것이 구약에 나타나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의 축복]이다. 이것을 성경은 약속(미래 완료)으로 말씀하신다.
 
[기도]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But the olive tree answered, 'Should I give up my oil, by which both gods and men are honored, to hold sway over the trees?' (사사기 9:9)
 
우리의 금식이 나의 힘과 능이 아닌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며 사는 고백임을 잊지 않고 사순절을 지나게 하옵소서. 쏠트 3.3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절제와 금식을 통해 생명 사랑의 가치에 순종하게 하시고, 강도 만난 이웃과 같은 북녘 땅의 어린 생명들을 돌보게 하시고 그들 안에 영생의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