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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2024 말씀을 걷다

말씀을 걷다 사사기 12-15장

입다는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그런데 본 부인에게서 난 자식들이 입다를 내쫓았다. 형제들에게 쫓겨난 입다는 돕 땅에서 살게 되었고, 그곳에 많은 잡류들이 모여들었다고 사사기는 기록하고 있다(사사기 11:1-2). 이렇게 입다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고 인생이 억울한 사람이다.
 
이제 암몬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다. 입다를 몰아낸 적자들이나 기득권자들이 암몬의 침공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그래서 입다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 입다는 나를 쫓아낼 때는 언제이고 이제는 나를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하느냐고 말하자 장로들이 이 일을 해결하면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한다. 그러자 입다는 여호와께서 나를 승리케 하시면 나를 우두머리로 삼겠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장로들은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여 그리하겠다고 대답한다.
 
이렇게 여호와의 이름이 수시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들이 깊은 신앙심을 가진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을 모른다. 내가 하나님을 알아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심으로 구원해 주셨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구원 이후에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마치 알기에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순서를 바꾸어 이해하면 우리는 종교인이 되어버린다.
 
입다에게 이 일은 반전의 기회였다. 그것을 놓고 입다는 이렇게 서원을 했다. 여호와께서 승리를 주시면 승리 후에 자기를 맞으러 나온 첫번째 사람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서원이다(사사기 11:30-31). 인신제사는 몰렉에게 제사하는 가나안의 우상숭배 의식이다. 이 서원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없다. 이제 문제가 생긴다.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사사기 11:34-35a)
 
승리 후에 자기를 맞이한 첫번째 사람이 무남독녀 딸이었다. 자기의 잘못된 서원 때문에 딸이 제물로 죽는데 승리하면 뭐할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원을 하며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을 한 것이다.
 
사사기 12장에 오면 입다가 승리를 하고 돌아오자 전국적인 칭찬과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에브라임이 나와 시비를 건다. 에브라임은 가장 큰 지파이고 후에 북이스라엘을 세우는 지파이다. 이 에브라임이 나와서 ‘너는 싸우러 가는데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이것은 싸울 때는 방관하고 있다가 입다가 승리하자 시샘하여 그를 치러온 것이다. 에브라임은 입다에게 네가 우리를 부르지 않았으므로 너와 너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위협한다.
 
이런 사건들이 모순되게 나열되어 있는 것이 입다의 스토리이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자이지만 현실 속에서 그 믿음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산다. 소원은 있지만 정체성이 가난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 이기는 싸움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 깊은 이야기를 입다가 품고 있다. 그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구해 주신다.
 
사사기 12장에는 입다 이후 [입산], [엘론], 그리고 [압돈]이라는 세 명의 사사가 나온다. -> 이들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하지만 사사기의 위치 곧 이스라엘이 멸절 시키지 못한 가나안의 가치관과의 혼합으로 인한 문제들, 다음 세대를 세우지 못하고 다른 세대를 만들어낸 [이야기의 흐름을 통해서 보면] 이들에 대해 좋은 해석을 내리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입다(Jephthah)는 사사로 6년을 다스렸다. 그 뒤를 이은 입산은 7년, 엘론은 10년, 압돈은 8년을 다스렸다. 이들을 소사사로 부르지만 그들이 누린 권력은 왕을 방불케 하였으므로 신앙의 순수함 보다는 권력을 누린 사사들로 볼 수 있다.
 
이 세 명의 사사에 대한 기록은 그들이 사사가 되었더라, 사사가 되어, 사사가 되었더라(사사기 12:8, 11, 13) 라는 표현만 나올 뿐 구원자로서의 사사 본연의 목적이 나타나 있지 않다. -> 이런 표현 안에 실날 같은 clue가 있다. -> 다른 사사들과 달리 이들에게는 [부르심]이 없다. 그러므로 이들은 소명자로서의 사역자가 아니었다. -> 모든 하나님의 일은 [부르심]에서 시작된다.
 
한국 교회에 [교회성장학]이라는 개념이 1980년도 말 경에 들어온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부터 교회들은 매년 표어를 만들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비전을 선포하고 표어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다만 그 비전과 표어가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 비전은 부르심에서 잉태된다. 부르심이 없는 비전은 인간의 야망에 불과하다.
 
“그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 그가 딸들을 밖으로 시집 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밖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더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칠 년이라” (사사기 12:9) -> 딸들을 밖으로 시집 보내고, 며느리를 밖에서 들여 왔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난해 하다. [밖]이 이스라엘 공동체 밖이라면 입산은 헤렘법(거룩법)을 무시한 사사이다. -> 가나안 정복의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경계하신 것이 그들과 섞이는 것이었다. 구약의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이스라엘이 위기 때마다 주변의 강대국들을 의지 했다는 기록은 하나님 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신앙의 본질에 대조되는 사건으로 등장한다.
 
압돈의 경우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는데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탓다고 기록한다(사사기 12:14). 이런 모습은 사사들이 자녀들에게 부를 상속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입산과 압돈 사이에 있는 사사 엘론은 그가 사사였던 것과 죽은 이야기만 나온다. -> 이들의 공통점은 긍정적인 단서를 찾을 수 없다는 것과 그들이 사사였다는 것, 곧 사사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 부르심이 없는 사역은 소명을 품지 못한 직업으로 끝이 난다.
 
입산, 엘론, 압돈 사사는 사사들이 점점 욕심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고발하려 했는지 모른다. 입산(אִבְצָן)은 [빠르다]라는 뜻으로 ->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기에 바빴으며, [상수리 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사사 엘론( אֵילוֹן)은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이 없고 직업만 소개되고 있으며, [종]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사사 압돈(עַבְדּוֹן)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주인 행세를 하고 다녔다. 사사기는 사사들의 이야기를 거듭할 수록 점점 내리막을 향해 달려가는 듯하다. 이 세 사사들의 시대 이후의 기록들은 그야 말로 인간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가를 가늠해 보려는 듯 내리막의 막장을 보여 준다.
 
[기도]
 
내 이름은 기묘자라. It is beyond understanding. (사사기 13:18)
 
내가 원하는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고집 부리지 않게 하시고 먼저 부르심(Calling)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하옵시며 나의 일이 직업을 넘어 소명이 되게 하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청지기 임을 항상 잊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것들에 대해서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