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목사 메세지/성경 속 주연들

[성경 속 주연] #4-1 노아, 의심없는 자

이번주 함께 나눌 인물은 '노아'입니다.
노아의 이야기는 조금 방대해서 2부로 나누어 다루려고 합니다. 첫번째는 홍수 이전에 노아의 모습을 보려고 합니다.

1. 노아가 살던 세상

노아가 살던 당시의 세상을 향해 성경은 죄악이 가득하고 악한 생각이 가득하고 부패하고 포악하다 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6:5)

"땅 위에 사람 지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느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창6:6-7)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고, 사람과 함께 완성하길 바랬던 그 세상이 썩어져 가는 것을 보고 한탄하고 지면에서 쓸어버릴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6:8)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은 노아는 1)은혜입은 자 2)의인 3)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창6:8-9) 이 세가지로 성경은 표현합니다. 은혜, 의인, 동행 이 세가지 개념에 대한 이해의 깊이 말씀의 깊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노아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마태복음에서 예수님도 마지막 때를 보고 노아의 때와 같이 임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24:37-39)

 

 

노아의 때와 마지막 때의 공통점은 1)죄가 가득한 세상입니다. 그리고 2)일상생활의 재미 입니다. 사람들은 노아의 때처럼 모르고 살아갑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의 소식을 듣고 종말의 소식을 들으나 듣지 못합니다.

노아의 때 사람들도 마음으로 생각으로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먹고 즐기고 마시고 노는 생활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할때에 가장 큰 어려움은 특별함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의 일상입니다.

 

2. 노아, 의심없는 자
그렇다면 노아와 다른 사람의 다른점은 무엇일까요? 노아가 이러이러해서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고 선택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후에 나오는 노아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은혜받은 의인이고 동행하는 자의 모습을 바라볼 뿐입니다.

하나님은 노아가 500세 되었을 때에 홍수가 있을 것을 알리고 방주을 지어 준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방주의 재료와 설계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창6:15-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실 때에 노아는 토를 달거나 의심을 하거나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하다 생각할 수 있겠으나 노아는 한번도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을 경험해본적도 없고, 홍수라는 것을 본적도 들은적도 없는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의심이란, 믿지 못하거나 확실히 알 수 없어 의아하게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의심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한 하나님을 의심하여 시작된 불행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사위인 다윗을 의심하여 처참한 최후을 맞이하고, 물 위를 걸어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처음에는 순종하였으나 바람과 파도를 보고 의심하여 바다속에 빠진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다 책망받은 도마처럼 우리들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있을까, 믿는다고 열심히 했는데 왜 여전히 나는 사는게 힘들까? 사실은 없는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우리를 괴롭히고 많은 사람이 그런 의심을 하다 교회를 떠나는 것처럼 믿음의 가장 큰 적은 의심입니다. 다른 말로 불순종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의심없는 믿음의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노아입니다.

 

3. 방주를 만드는 노아

고페르 나무로 만든 방주의 길이는 150m, 너비는 25m, 높이는 15m로 대략 14,000톤을 실을 수 있을 정도의 규모의 큰 배입니다. 그 큰 규모의 방주를 노아의 식구들로만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나무 자재를 구하는 것, 그 외의 다른 도구들을 구하고 운반하고 지지하고 못질하고 고정하는 데에는 노아와 그 세 아들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의 도움을 받았으리라 생각해봅니다.

삯을 주고 나무를 구하고 운반하고 일꾼들을 고용해서 방주를 만드는데, 일하는 일꾼들은 품삯을 받으며 일하면서도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속으로 비웃으며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그 모든 무시와 수모를 감내하고 그들의 말에 휘둘려 의심하지 않고 100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처럼 좋은 연장과 장비도 없는 그 시기에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동차도 없고 지게차도 없어 일일이 다 손으로 몸으로 나르고, 손에 가시가 박히고 멍들고 다치고 잘못만들어 다시 만들고 하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의 어떠한 꼼수도 적당한 타협도 없습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6:22)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한장만 넘기면 완성되는 방주를 보면서 노아가 받았을 무시나 고통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 안에 동물이 다 들어갈까? 공룡은 없었을까? 먹을 것은 어떻게 하지 안썩나? 하는 어린아이 같은 상상과 과학적으로 말이 될까 하는 상상에 가리워 노아의 고생스런 100년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성경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책이 아닙니다. 인간의 논리로 보면 허술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오경을 기록한 모세에게 창조부터 모든 사건을 일일이 설명했다고 한들 모세가 이해했을리가 없으니까요.

노아의 방주와 홍수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도 묵묵히 순종하고 한걸음씩 나아가는 노아의 모습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 구절 한 구절 따지고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음을 인정하고 성경을 계속해서 읽어나가며 동행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합니다.

사건이 터지는 곳의 시작점에는 의심으로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있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외면하고 자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의 현실과 다르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의심하고 신뢰가 무너지는 공동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보다는 정신 수양을 하기 위한 모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히11:7)

 

노아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한걸음씩 나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노아는 반대와 고난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의롭다 칭함받고 구원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노아는 언제 홍수가 오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홍수가 올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노아의 때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 마지막 때 우리는 분명히 세상의 끝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죄가 번영한 이 땅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일상생활의 재미에 취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놓치지 않고 마지막때를 믿음으로 준비하는 신실한 성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