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주연 인물로 아벨을 다뤄볼까 합니다.
현재 2020년 3월의 상황은 코로나19로 인해 수많은 교회들이 예배중지 혹은 온라인 예배등으로 대체되거나 교회 안에서 모임 중단 식사교제 중단 마스크 착용 등 여러가지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정부가 어떻고 행정이 어떻고 하는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예배가 무엇인지 예배자는 어떤 사람인지 되돌아보고 예배를 먼저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겉으로만 예배자인척 하던 사람들이 걸러지는 시간이 된다 생각합니다.
스스로 알지 못했던 자신이 예배를 사모했는지 아닌지 예배가 있던 시간에 자율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상황속에서 본질이 드러나는 시간이 되고 다시 진정한 예배자로 다시 세워질 기회입니다.
자, 그럼 하나님 앞에 선한 예배자 아벨을 나눠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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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담과 하와의 둘째 아들 아벨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1-2)
아벨은 첫사람 아담과 하와의 둘째 아들입니다. 위로는 가인이라는 형이 한명 있죠. 가인과 아벨 형제는 부모님 아담과 하와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들어 아는 자들입니다.
에덴동산과 선악과 사건 그리고 제사의 방법까지, 아마도 아담과 하와와 함께 제사를 드리고 배우는 어린시절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라서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되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홀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가 되었을 때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창4:3-4)
2. 가인의 제사
바로 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아벨과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나 가인과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4-5)
여기에 대해서는 몇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가인이 하나님이 아담에게 알려준 피흘림의 제사를 드리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았다는 것과
다른 하나의 해석은 피흘림의 제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인도 받지 않으셨으니 가인의 일상에서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옳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가 모두 맞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경의 사건을 바라볼 때에는 성경 속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넘어 지나치게 추론하지 않고 복음을 말하는 성경을 복음 안에서 해석해야 됩니다.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가인은 인본주의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신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에게 화를 내고 아벨을 죽이는 선악을 판단하는 자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예배자의 삶을 살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가인이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하와에게 약속한 여자의 후손이 가인이 될 것이라 기대한 것입니다. 가인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 메시아로 기대했으나 가인은 그들의 기대처럼 자라지 않았고 둘째 아들을 낳아 "허무하다"라는 의미로 아벨이라 이름 짓습니다.
하나님이 6일째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나서 하신 일은 안식하신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이 할 일은 하나님과 함께 창조에 동참하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배자로 사는 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수많은 동물 중에서 유독 사람들이 강아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강아지가 그 주인만을 기다리고 바라보고 기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바로 가인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제사가 아닌 의무감으로서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화를 냅니다. 화는 자신이 옳다고 여길 때에 느끼는 감정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을 때에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를 생각해야되는데 가인은 그렇지 않고 선악을 판단하는 자가 되어 화를 내었습니다.
오늘날도 가인과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내가 시간을 내고 물질까지 드렸으니 하나님은 내 예배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판단하는 자가 되어 자기가 중심이 된 예배를 드리면 가인과 같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적인 예배입니다. 그렇게 가인은 예배의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3. 아벨의 제사
그렇다면 아벨의 제사를 어떤 제사일까요? 아벨의 제사는 자신이 키운 양의 피를 흘린 제사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알려주심 제사의 모습입니다.
다양한 제물의 제사의 모습은 한참 후 모세의 때에 나타나는 제사의 모습입니다. 어떤 제물을 드리는지보다 삶이 중요하다라도 말하는 설교나 설교자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 말도 다 맞습니다. 그 말들도 맞다해서 다른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먼저 가인과 아벨의 제사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제물'입니다.
아담과 하와과 선악과를 먹은 후에 우선적으로 필요했던 것은 바로 '옷'입니다. 그들이 옷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기 위함입니다.
죄를 범한 직후에는 아직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 전이기에 몸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춥거나 덥거나 몸이 상할 일이 존재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랬다면 이미 그 전부터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 있은 나뭇잎 옷은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 다시 만들어야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가죽옷을 만들어 입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다는 말은 에덴동산에 처음으로 죽음이 발생했음을 말합니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 때문에 '의도적 살생'이 발생한 것입니다.
결국 선악과 사건으로 인해 사람의 죄의 결과인 수치를 가리기 위한 피흘림이 생긴 것입니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계16:15)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계19:13)
요한계시록에서 성경은 옷은 사람의 부끄러움, 수치를 가리는 것이며 그 옷은 하나님의 말씀, 말씀이 육신 되어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합니다. 가죽옷을 입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는 자들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시간이 흘러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을 낳고 가인은 농부가 아담은 목자가 되었습니다. 성경 속에서의 육식은 노아의 방주 이후에 생긴 것이므로 그들은 채식을 하던 때이기에 양을 기르는 행위는 식량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창9:3)
즉, 가인은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한 사람이고 아벨은 하나님이 보여 주신 방법대로 수치를 가리기 위해 일한 사람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자신의 공로를 기념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의 보상을 기대하는 행위의 제사라면,
아벨의 제사는 가죽옷으로 사람의 치부를 가려주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행위의 제사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11:4)
히브리서는 아벨과 가인에 제사에 대해서 '피'의 유무가 아닌 '믿음'의 유무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아벨의
제사는 피와 제물로 그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아벨과 아벨의 제물만을 받으신 것입니다.
4. 예배와 예배자
현재에 와서도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 어디서 예배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기념하느냐입니다.
구약에서의 제사가 피흘림의 제사였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신 이후의 제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하나님의 어린양, 구원자,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며 가르치신 것은 자신을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고전11:23-34)
예배로 모이는 것은 우리가 함께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게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함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이기적인 모습으로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말라하십니다.
코로나로 인해 교회의 예배가 제한된 이때에 무엇이 예배인지 어떤자가 진정한 예배자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나라와 싸우고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이 이제까지 드려왔던 예배가 가인의 예배인지 아니면 아벨의 예배인지부터 돌아볼 때입니다.
그 누구도 예배를 막을 수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말라 할때에라도 우리는 예배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처음 겪는 지금 이 시기에 여러분들이 참된 예배자로 바로 서길 바라고, 함께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누구보다 더 뜨겁게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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