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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미니스트리/2024 말씀을 걷다

말씀을 걷다 사무엘하 13-15장

사무엘하 13-15장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다말이라는 아름다운 여동생이 있었다. 그런데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다말을 좋아해서 상사병에 걸리게 된다. 그러자 암논의 나쁜 친구 요나답이 조언을 해서 병든 것처럼 누워서 다말을 청하여 병간호를 부탁하게 한다. 그렇게 해서 다말은 오라비 암논에게 겁탈을 당하게 된다(사무엘하 13:1-14). 그런데 이 암논이 나쁜 놈이다. 다말과 동침을 한 후에 다말을 미워하기를,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 미워한다(사무엘상 13:15). 다말이 암논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호소하지. 자기를 겁탈한 것보다 자기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더 악한 것이라고 하소연했지만 암논은 종을 시켜 다말을 내어 쫓고 문을 잠근다. 이제 다말은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의 채색 옷을 찢고 재를 머리에 덮어 쓰고 크게 울부짖는다. 이 사연을 알게 된 다말의 오라비 압살롬은 다말을 자기 처소에서 돌봐 준다. 이 모든 일을 들은 다윗은 크게 노했지만 암논을 벌하지 않았고, 이에 압살롬은 암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이 년의 세월이 지나서 목자들의 축제인 양 털을 깍는 때에 압살롬이 다윗에게 암논과 함께 양 털 깍는 일에 가겠다고 청하자 다윗이 허락을 한다. 그 때 암논와 함께 다윗의 모든 아들들이 함께 간다. 그 때 압살롬은 종을 시켜서 잔치 자리에서 암논을 죽인다. 그리고 다른 왕자들은 놀라서 도망친다(사무엘하 13:23-29). -> 그런데 압살롬이 ‘모든 왕자들을 다 죽였다’고 소문이 난다. 그래서 다윗이 드러눕고, 다른 신하들도 난리가 났고, 그 때 다윗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이 다른 왕자들은 죽지 않았다고 얘기해 주고, 오직 암논만 죽였는데 그것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암논이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 한 것이라고 말해 준다(사무엘하 13:32). 이제 다윗은 압살롬에게 암논을 죽인 죄를 물어야 하고, 동시에 아들인 압살롬을 사랑하기에 그를 죽이지도 못하고, 그런 와중에 압살롬은 그술로 도망을 간다.
 
다윗은 이 문제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 오빠 암논이 여동생 다말을 범하고, 이에 대해서 압살롬이 분노하여 암논을 죽였다. 다윗이 이 문제에 대하여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것은 [정죄의 자리]는 항상 그 [자격을 묻는다]는 데에 있다.
 
죄인이 죄인을 정죄하지 못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를 하면, 그 판단과 정죄가 우리 스스로에게 덫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인간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금하셨다. 바로 여기에 다윗의 딜레마가 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해야 하지만 이미 만천하에 자신의 실패가 드러난 다윗은 법의 기준이 되지 못했다. 다윗은 밧세바의 관계 뿐 만이 아니라 그녀의 남편을 죽였다. 이제 다윗이 무엇을 해도 사람들은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가 왕권을 사용하면 뒤에서 쑥덕거릴 것이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왕권이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무엘하 15장에 오면 압살롬이 그 틈새를 치고 쿠(Coup)를 일으키게 된다.
 
이런 모든 일이 밧세바 사건 이후에 다윗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다윗의 인생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부러워 하는 것이 골리앗을 죽일 때의 담대함과 그의 고백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을 그 이후로 한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편에 나타나는 다윗의 기도들을 보아도 골리앗을 죽일 때의 용맹스러운 그런 자신만만한 기도들은 없다. 이에 비해서 다윗을 다윗 되게 하는, 성경이 하고 싶은 다윗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밧세바 사건을 배경으로 한 회개와 그 이후의 삶이 가졌던 내용들이 눈물과 한숨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해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다윗의 생애는 [밧세바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진다. 골리앗을 물리치고, 사울에게 쫓겨다니면서의 신실함 그리고 드디어 통일 왕국의 왕이 되고 죽으면 좋은데 밧세바 사건 이후에 질곡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바로 거기에 은혜가 담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것같이 다윗은 은혜의 조상이요 은혜에 대한 대표적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가 은혜의 대표자라는 것은 그가 영웅이거나 신화의 주인공이라서 만든 업적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받을 수 없는 것을 받은 자]의 대표자인 것이다.
성경에서 영웅과 전설을 뽑아내고 부러워하고 소원하는 것은 오히려 성경의 진수에 들어가는데 방해가 된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으로 인하여 그는 부끄럽고 민망하고 할 말이 없는 처지에 놓인다. 다윗이 은혜의 대표인 것은  그의 생애에서 그가 ‘얼마나 훌륭했느냐`는 것 보다 그가 할말이 없는 자가 된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그가 은혜의 대표가 되고 은혜가 담긴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놀랍게도 시편에서 다윗의 고백을 보면, 밧세바 사건은 그에게 없던 나쁜 것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에게 원래 있던 것이 들통나는 것으로 고백된다(시편 51편). 하나님께서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그에게 깨우치신 것은 인간의 지극한 정성을 바치는 것이 신앙의 기초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의 기초는 우리가 원래 누구인가를 알고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고, 상상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이 우리의 인생안에 채워지는 것이다.
 
다윗은 왕의 자리에 부끄러운 자로 살아야 하고,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겪어야 하며, 결국 그 아들 마저 잃게 된다. 그가 잃고 잃으면서 얻고 얻는 것이 있다. 드러나 있는 것들이 무너지면서 그에게 채워지는 것이 있다. -> 바로 [가난한 마음], [상한 마음]이다. 바로 여기에서 다윗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기도]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 하니 But Ittai replied to the king, "As surely as the LORD lives, and as my lord the king lives, wherever my lord the king may be, whether it means life or death, there will your servant be.” (사무엘하 15:21)
 
곤고함이 의리를 이기지 못하게 하시고. 연약하여 넘어진 친구와 고난 중에 있는 친구를 외면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힘든 자들을 도울 능력과 힘과 마음을 주옵소서. 우리가 연약하고 넘어질 때 구원이 되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 안에 상한 마음과 애통하는 심령을 채워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