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무엘하 19-21장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되며 다윗은 부하들에게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요압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압살롬은 죽고(사무엘하 18:1-18), 다윗은 슬프게 운다(사무엘하 18:19-33).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을까? 아들 암논이 다말 사건을 일으키고, 압살롬이 복수로 암논을 죽이고, 그 압살롬을 쫓겨나게 되고, 그가 오랜 시간 후에 돌아와서 민심의 마음을 훔치고 반역을 준비했다. 그 중에 아히도벨이 그의 책사가 되고, 아버지의 후궁을 취하여 아버지의 수치를 드러내고, 다윗은 피난길에 시므이의 저주를 받고 하는 압살롬의 반역에 대해서 다윗은 왕권의 싸움이 아닌 아버지의 마음으로 압살롬을 아끼는 고통을 쏟아낸다. 그러나 압살롬은 권력 투쟁의 이해관계에 묶여 있는 어둠의 해결사 요압에 의해서 죽게 된다.
가장 좋은 그림은 다윗이 왕이 되고, 권력과 영광의 정점에서 하나님께 성전 짓겠다고 서원한 날 심장마비로 죽는 그림이다. 그러나 인생은 오묘하여 다윗은 밧세바 사건을 시작으로 바닥이 보이지 않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상기한 다윗의 아들에 대한 반복되는 애통은 다만 아들의 죽음 만이 아니라, 자기 인생 전체에 대한 절망으로 보아야 정당하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도 끝나지 않는다.
압살롬의 반역이 진압되었지만 다윗은 다시 세바의 반역 앞에 서게 된다. 세바는 사울이 속했던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다윗 정권에 반대라는 세력이었다. 이 세바의 반역에 남은 지파들이 합세함으로 큰 문제가 된다. 이 쿠(coup)의 성격상, 다윗은 유다 지파에게 기댈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일을 아마사에게 맡긴다. 그런데 이게 이상하다. 왜냐하면 아마사는 압살롬이 반역해서 세운 그의 군대 장관이었다. 왜 다윗은 이렇게 중요한 일에 요압을 세우지 않고 아마사를 세웠을까? 아니나 다를까 요압은 쫓아가서 인사하는 체 하며 칼로 아마사의 배를 찔러 죽인다(사무엘하 20:9-10). 왜 다윗은 아마사를 세웠을까? 라는 질문과 왜 다윗은 요압을 세우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은 같은 질문이다. 요압은 자기 아들 압살롬을 죽였다. 같은 편에 있어도 보기 싫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렇게 인생은 단순하지 않다.
이제 요압은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의 지휘관이 된다(사무엘하 20:23). 다윗이 요압을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게 된 사연의 시작이 밧세바 사건이다. 그 때 다윗은 요압을 불렀다. 그리고 밧세바의 남편 되는 우리야를 죽이라고 했다. 우리야는 가장 격렬한 전투지로 보내져서 전사하게 된다. 그때부터 요압은 다윗의 약점을 쥐고 있는 사람이 된다. 다윗에게는 요압이라는 사람은 필요했다가, 민망했다가, 이제는 겁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압살롬의 반역 때, 다윗은 분명히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했지만 요압은 죽였다.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두고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면서 울면서 애곡했다. 바로 그 장면에서 요압이 다윗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 하였나이다.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어떤 사람이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신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사무엘하 19:5-8)
이 말씀을 잘 보면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이것은 협박이지? 이 말을 듣고 다윗은 화들짝 놀라며 백성 앞으로 나간다. 이런 모습, 지금 다윗은 자신이 원치 않는 길에 서있는 것이다.
다윗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골리앗 앞에서 위풍당당하여 골리앗을 물리친 사람이었다. 그 용감함과 영웅적 은사가 이렇게 허무하게 없어져 버렸다. 그는 지금 민망하고, 답답하고, 부끄러운 인고의 자리에 처해있다. 이 모든 시작이 밧세바의 사건이다. 그 때부터 다윗의 인생은 능동태에서 수동태로 끌려간다. 이것이 다윗과 밧세바 그리고 요압의 역학 관계이다. 이제 피할래야 피할 수 없이 다윗은 가난한 마음의 사람, 애통하는 사람이 되었다. 자기 의지로 겸손을 결심하지 않아도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다.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서 있다. 이런 수준의 사람은 스스로에게 할말이 없는 인생을 감수하는 사람에게 만들어진다.
바로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어떤 사람이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왕이 문에 앉아계신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사무엘하 19:8)
[앉았다]는 이야기는 ‘통치’를 상징한다. ‘앉았다’는 말은 자리의 권위와 실속이 회복되었다는 표현으로 [다윗의 왕적인 권위가 회복됨]을 상징한다. 여기에 오기까지 다윗의 후반전을 살펴보자. 밧세바 사건 -> 암논 사건 -> 압살롬에 의해 암논이 죽음 -> 압살롬의 가출과 반역의 준비 -> 책사 아히도벨의 책략으로 인해 다윗의 후궁을 압살롬이 취함 ->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 -> 아버지의 마음으로 압살롬을 아끼는 고백 -> 그러나 시므이가 압살롬을 죽임 -> 아버지 다윗의 비통함 … 그리고 다윗은 다시 왕좌에 앉았다. -> 보이는가? 이제 다윗에게 왕좌는 예전과는 다른 의미의 자리가 된다. 그러므로 현독자인 우리는 이런 다윗의 달라진 모습이 드러나는 부분을 찾아내야 한다. 이 부분의 제목을 [다윗의 정치]라고 부르고 싶다. 이제 다윗은 정치를 한다.
민심이 다윗을 떠났다. 다윗의 왕좌에서 제일 먼저 민심을 돌이키는 일을 한다. 제일 먼저 다윗 자신과 같은 지파이지만 자기에게서 돌아선 유다 족속에게 독촉을 한다. 다윗은 사독과 아비아달을 보내서 ‘반란이 다 진압되고 내가 다시 왕좌에 앉았는데 너희가 이 일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유다 족속이 돌아온다. 그러자 이스라엘도 따라온다. 그리고 바후림에 있는 시므이, 다윗을 저주했던 놈이다(사무엘하 16:5이하). 그 시므이가 용서를 구하며 다윗에게 왔다. 그 때 아비새가 시므이를 죽이려 하자 다윗이 말린다. 또 앞에서 사울의 집에 남은 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도 나온다. 다윗에게 은혜를 입었지만 다윗이 위기 중에 므비보셋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 종인 시바가 다윗을 환영했다. 그런데 다윗이 왕권을 회복하자 므비보셋이 이런저런 변명을 하면서 나왔다. 다윗은 따지지 않고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받아 준다.
다윗은 달라졌다! 전에 나단이 다윗을 지적했던 내용을 생각해 보자. 어떤 부자가 있는데 양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 손님이 찾아오자 자기 양을 잡지 않고, 이웃에 있는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서 접대를 했다고 말했지? 그러자 다윗이 그런 나쁜 놈~ 하며 잡아 죽이라고 했다(사무엘하 12:1-6). 그런데 지금 다윗은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 자기를 등지고, 배신하고, 강한 자의 편에 붙었던 유다 지파, 이스라엘, 시므이, 므비보셋을 용서한다. 고도의 정치적인 기술로 관용을 베풀고 있다. 이게 달라진 다윗의 모습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들을 용서하는 다윗에게서, 스스로를 용서하는 모습이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실력]은 성공의 자리에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잘못하고 넘어졌지만, 엎어져 있지 않는 사람, 넘어졌지만 일어서는 사람에게서 만들어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선이나 열심에 당신의 영광을 담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가 아니면 소망이 없는 자에게 부어진다.
이제 중요한 한 사람이 등장한다.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는 압살롬과 대치하고 있는 다윗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대준 사람이다(사무엘하 19:32). 다윗이 다시 왕의 자리를 회복하며 바르실래를 청하고 그에게 상을 주고자 하자 바르실래는 자신은 다윗이 안전하도록 돕고, 다시 왕의 자리를 회복하도록 도운 것이지 그것으로 보상을 받고자 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늙었고 죽을 나이가 되었다고 하며 사양한다(사무엘하 19:34-37).
바르실래는 자신의 선행을 공로로 만들지 않았다. 그가 가진 부를 [섬기는 책임으로] 알고 실천했다. 그는 물질적인 부자만이 아니라 마음도 부요한 사람이었다. 그가 생각한 기회는 [섬김]이었다. 하나님 앞에 중요한 사람을 섬긴 것으로 족했던 것이며, 그것이 자기의 역할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하나님께로 갈 것이다. 바르실래의 섬김을 받은 다윗은 정말 복된 사람이다. 이렇게 섬길 수 있는, 그리고 이런 섬김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당신의 인생에도 주어지기를 축복한다. 바르실래… 어른이다.
[기도]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세라 그는 큰 부자이므로 왕이 마하나님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더라 Now Barzillai was a very old man, eighty years of age. He had provided for the king during his stay in Mahanaim, for he was a very wealthy man. (사무엘하 19:32)
고난이 낭비하지 않게 하시며, 고난으로만 담을 수 있는 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연약한 자, 넘어진 자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회가 더욱 가까이 있음을 알고 영적인 안목으로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어른 바르실래와 같이 자신의 자리와 자신의 책임을 알고 순종하여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모자이크 미니스트리 > 2024 말씀을 걷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씀을 걷다 열왕기상 1-4장 (0) | 2024.05.17 |
---|---|
말씀을 걷다 사무엘하 22-24장 (0) | 2024.05.17 |
말씀을 걷다 사무엘하 16-18장 (0) | 2024.05.17 |
말씀을 걷다 사무엘하 13-15장 (0) | 2024.05.17 |
말씀을 걷다 사무엘하 9-12장 (0) | 2024.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