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6-18장
아히도벨은 다윗의 책사였다. 그가 압살롬에게 붙어서 미처 피난하지 못한 다윗의 후궁들과 대낮에 동침하게 했다. 그것을 상징으로 압살롬이 아버지보다 더 크다는 것을 모든 백성에게 보이라는 책략이었다. 이런 아히도벨의 계략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사무엘하 16:23)
아히도벨의 계략이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계략과 같이’ 사람들에게 여겨졌다고 하지? 그는 민심을 이용할 줄 알았고 그것으로 정치를 하는 사람이었다. 상기 했듯이 이 사람은 원래 다윗의 책사였는데 압살롬을 따라간 사람이다.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해서 그가 다윗을 버렸다는 점을 눈 여겨 보아야 한다.
아히도벨 같이 유능한 책사가 다윗을 버렸다는 것은 [다윗에 대하여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고, 자신의 탁월한 책사로부터 버림 받는 다윗의 모습은 지금 그가 왕이지만 왕 답지 않은 모습, 왕의 권위와 존경을 잃은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사람에게 실망을 할 때마다 그 사람을 버리면 남아있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사건들을 보면 다윗의 실력이 떨어져 보이지는 않는다. 압살롬의 반역에 쫓겨 갈 때 사람들이 찾아오고 잇대가 다윗을 호위한다. 잇대는 가드 사람으로 블레셋 사람이다. 책사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편에 섰다는 것은 다윗의 측근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잇대가 다윗을 돕는다. 그리고 사독과 아비아달이 법궤를 가지고 다윗을 따른다. 그러자 다윗은 법궤는 항상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하며 돌려보내고 대신에 성읍의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는 일을 맡긴다(사무엘하 15:13-29요약). 그리고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세를 위장 전향시켜서 아히도벨의 책략에 대응하게 한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그가 가진 실력이나 정치력이 녹슬지 않은 모습이다.
그러면 압살롬의 반역과 자신이 신뢰하던 책사 아히도벨의 배신으로 다윗은 어떤 문제를 가진 것일까? 다윗의 [영혼이 곤고한 것]이다. 하나님 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그의 잔이 채워지지 않는 것, 이런 다윗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다윗은 피난길에 바후림이라는 곳을 지나게 된다. 거기에서 사울의 친족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저주했다. 이에 대해 다윗을 일행 중에 아비새가 시므이를 죽이겠다고 하자 다윗은 그를 만류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사무엘하 16:10)
이런 다윗의 반응은 이 모든 환경과 사건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리시는 벌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으로,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채워져야 하는 것이, 다윗에게 채워지지 않은 모습을 그려낸다.
바로 이 시간이 다윗에게 매우 중요한 시간이다. 왜냐하면 그가 [상한 심령]을 배우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 모든 일에 대하여 할 말이 없이 쫓긴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우리가 대면해야 할 정말 중요한 인생의 깊은 곳이다. 그의 잘남으로 드러나는 불꽃은 보이지 않고 다윗은 흔들린다. 그렇게 흔들리는 불빛은 인생의 곤란한 곳을 비추는 불빛이다. 이 빛이 흔들리지만 어둠을 밝힌다.
압살롬의 반란은 민심을 등에 업고 권력을 얻기 위한 싸움 정도이다. 그러나 이 일이 책사 아히도벨에 의해 더욱 대담한 복수가 되고 파멸이라는 국면에 접어든다. 아히도벨에 의해 압살롬도 다윗도 몰리지만 아히도벨 역시 죽을 처지로 몰린다. 그는 결국 자기의 계획이 후세에 의해 저지되자 집에서 자살하고 만다. 압살롬은 머리털이 나무에 걸려 매달린 채 요압에게 죽게 된다. 이런 모습들은 죄가 어떤 일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죄는 파멸을 만들 뿐 아니라 파멸을 확장한다.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을 듣고 이렇게 통곡한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사무엘하 18:33)
상한 심령이 보인다. 바로 이 자리가 하나님이 만드시려는 자리이다.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의 자리는 영웅의 자리였다. 그러나 후반부의 자리는 눈물과 회한의 자리이다. 다윗의 전반기 인생에서 그는 물 맷돌로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그런 종류의 신앙과 그가 가진 최선은 밧세바를 이기지 못한다. 상한 심령은 항상 최선을 이긴다.
다윗이 아무리 영웅적인 업적을 쌓았을 지라도 죄를 이기지 못한다. 다윗이 죄를 지은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일어나는 가장 놀라운 반전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들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우는 다윗의 고백은 바로 그러한 깨달음이다.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이다. 바로 ‘내가 죽었어야 했다’는 울음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다윗은 모든 못난 자를 용서하는 자리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용서를 더 잘난 자가 못난 자에게 베푸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용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용서는 나에게 잘못한 자를 판단하고 심판할 자격이 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아는 데서 시작되며, 자신도 용서받아야 할 사람인 것을 아는 사람이 용서한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은 그동안 자기 인생 안에 담긴 것들에 대해서 아직 해석을 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선한 사람일 수는 있다. 인간은 자신이 선할 수록 타인의 잘못에 대해 관대하지 못한다. 다윗은 이제 타인에 대해 관용할 수 밖에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진다. -> 나이가 들어 지난 날을 돌아보면 후회할 것이 많다. 다시 돌아가서 고치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러나 못한다. 과거는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속 깊은 침묵]이다. 자신이 무엇에 대해서도 판단자나 심판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침묵한다. 이런 것들이 지금 다윗에게 채워지고 있다.
인간의 전 역사를 통해 다윗보다 나은 사람은 하나 있을까 말까 하다. 영웅성으로 비교해도 그보다 나을 수 없고, 그의 죄인 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의 깊이도 넘어설 수 없다. 하나님께서 누르시면 엎드릴 수 밖에 없다. 혹시 하나님께서 다시 세우시면 잘난 체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정을 품고 일어서기를 바란다. 이렇게 다른 세상의 가치가 다윗의 후반전에 드러난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담아 내시려는 것들이 담겨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선을 담으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것을 담으신다. 이것이 밧세바 사건 이후의 다윗의 생애이다.
이러한 다윗의 후반전을 우리 역시 피해갈 수 없다! 이 은혜가 어떻게 담기는지 마태복음 1장에 드러난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태 1:6)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라고 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하지? 주어가 다윗이 됨으로 그 뒤의 모든 내용을 다윗이 지고 가야 한다. 이 창피스러운 선언의 자리, 거기에 예수님이 오신다(담기신다). 그 자리에 십자가의 은혜가 담긴다. -> 거기서 다윗은 민망하게 그리고 고맙게 서있는 사람이 된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자녀가 된다. 나를 근거로 한 그 무엇도 없는 자리,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자녀’됨, 이것이 우리의 가치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삶의 자리를 무한히 은혜로 적용할 수 있는 실력은 연단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실력을 마음이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자리, 애통할 수 밖에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만들어 내신다.
[기도]
왕의 마음에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나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The king was shaken. He went up to the room over the gateway and wept. As he went, he said: "O my son Absalom! My son, my son Absalom! If only I had died instead of you--O Absalom, my son, my son!” (사무엘하 18:33)
우리의 영혼이 주님 품 안에서만 평안을 얻을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허무한 것에 의지 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과 잇대어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에 자랑이 채워지지 않고 은혜가 채워지게 하옵소서. 나의 최선을 채우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을 담아내게 하옵소서. 주여!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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