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22-24장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논쟁이다. 이 문제는 서로 다른 주장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 안에 있는 중요한 내용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안에 인간의 자유가 담겨있다. 이 자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거절할 수 있는 자유,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까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제하지 않으신다. 죄를 짓는 것을 허락하신다는 것은 죄를 선택하라는 뜻은 당연히 아니지. 주어진 자유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스스로 선택하라는 뜻이다. 사랑이 강제될 때 더 이상 사랑이 아니듯 우리가 가진 자유는 가장 아름답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품격이며,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백성 된 우리가 가진 거룩한 책임이다.
탕자가 집을 떠날 자유를 허락한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개의 비유가 있는데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이다. 앞의 두 비유는 모두 목자가 양을 찾아 나서고, 여인이 드라크마를 찾는데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기다린다. 이 기다림이 가진 힘이 찾아 나섬 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심의 무게가 한량이 없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허락한 자유에 대한 책임을 깨닫기 까지 기다리신다. 나는 이것이 사랑의 위대한 속성으로 보인다. 기다림이 포기되는 순간 사랑을 죽고, 기다림이 계속되는 한 사랑은 항상 기회가 있다. 지금 우리는 말세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시대는 아직 은혜의 시대요, 아버지가 기다리시는 때이며, 이 말세에 교회가 존재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한다. 아버지의 기다림 안에 교회는 사랑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며 증거로 그리고 증인으로 살고 있다.
밧세바를 범한 것은 하나님의 다윗에게 의도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선택으로 잘못된 것을 선택한다. 그로부터 시작된 다윗의 후반부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그 안에 하나님이 무엇을 담으시는가? 이것이 다윗에게 담긴 하나님의 역설이다.
밧세바 사건으로 시작되는 다윗 인생의 후반부는 영웅적인 다윗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그저 연명하는 수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우리는 다윗을 영웅으로 그리기를 좋아하지만, 실상은 다윗의 후반전이라는 현실을 살아간다. 바로 그곳에 은혜가 담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사람이다. 그의 성실함으로 인해서 얻어진 평판, 그리고 세상에서의 축복을 우리는 사모하지만, 그러나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그것들이 하나 둘 씩 무너진다. 그 무너진 자리에 은혜가 담긴다. 우리가 다윗을 영웅시 하는 것이 대리 만족이라면 다윗의 후반전은 우리의 현실이다.
다윗의 전기 초반에 일어난 다윗의 위대한 영웅성이, 그의 깊고 사려 깊은 성품이 밧세바를 못 이긴다. 마태복음의 기록처럼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선언됨으로, 그는 영원히 부끄러운 족보를 남긴다. 바로 그 그릇에 예수님이 담기신다. 그렇다면 다윗의 후반전 같은 우리의 인생에도 희망이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우리는 다윗이 겪은 민망함, 그의 애매모호함, 그의 자책들이 동일하게 있다. 그런데 그게 일을 하고 있다. 그런 환경들이 우리를 생각하게 하고 고민하게 한다. 잠 못 이루는 밤을 만들고 우울증을 만들어 낸다. 그 속에서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성의, 의지, 각오, 이상 이런 기대하고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에서 어떻게 벗어 나는가를 고민한다. 벗어나려 해도 탈출구가 없는 거기에 예수님이 담긴다. 그러자 그분의 성품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사랑, 이해, 용서, 인내, 섬김… 이런 멋진 것들이 우리의 성품에 담기는 것이다.
사람이 돈이 많아지고 시간이 남아돌면 절대로 좋은 쪽으로 가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억지로 포기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뛰어 넘으라는 얘기이다. 결국은 없어질 것, 영원한 나라에서 아무 쓸모 없는 것, 사망의 지배를 받는 것, 거기에 영생을 담으라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승부처는 ‘가치관’의 싸움이고, ‘세계관’의 싸움이다. 우리가 신앙의 이름으로 그은 첫번째 선이 편가르기 이다. ‘우리 편이십니까? 저들 편이십니까?’이다. 인종주의, 계급주의, 성차별주의, 세대주의, 국가주의, 교파주의, 교리주의… 판단거리를 찾는 끝없는 탐구가 지겹지 않은가? 자기와 다름에 대하여 반대하고 공격하는 세상의 흐름에 계속 굴복하며 사시려는가?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나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43-48)
[기도]
그가 위에서 손을 내미사 나를 붙드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He reached down from on high and took hold of me; he drew me out of deep waters. (사무엘하 22:17)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성금요일입니다. 가장 비참한 십자가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진 이 역설을 통해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듯이 낮은 자를 높이시고, 겸손한 자를 세우시며,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을 주시고,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복을 가지고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옵소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로, 그리고 증인으로 사용하옵소서. 분별하되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범사에 소망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2024년 쏠트 3.3 캠페인이 마무리 되어 갑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북녘 땅에 있는 어린 생명들이 돌보아 지는 구제가 아름답게 진행되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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