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시편 73-77편
1.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시편 73:25)
상기한 말씀은 아삽의 신앙고백이며,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신앙고백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아삽의 이러한 고백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고백되었는지를 따라서 걸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는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끌어 질 뻔 하였으니” (시편 73:1-2)
아삽은 자신이 거의 실족할 뻔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아삽이 어떻게 하다가 실족할 뻔했고, 걸음이 미끌어 질 뻔 했는가? 그가 실족할 뻔 한 이유는 ‘악인의 형통’ 때문이었습니다.
2.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시편 73:3)
아삽의 실족할 뻔 한 이유는 악인의 형통함과 오만함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을 잘 보시면 아삽이 그것을 ‘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믿음의 주요 대 제사장이신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삽은 믿음의 주만 바라 본 것이 아니라,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또 오만한 자,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불신자들을 부러워했습니다. 아삽이 부러워한 이유가 등장합니다.
3.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시편 73:4)
아삽이 악인과 죄인들을 관찰해 보았더니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악인이나 죄인들이 고통가운데 죽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고도 잘 먹고, 잘 살다가, 잘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으면 고생을 좀 해야 하는데, 잘 먹고, 잘 살고, 잘 죽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타인과 같은 고난도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시편 73:5)
못된 사람은 망하는 일도 생기고 어려운 일이 생겼으면 좋겠는데,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고,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시편 73:6)
악인이 형통할 뿐 아니라, 교만하고 강포해도 잘나가기만 합니다.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제가 이 구절을 잘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삽이 얼마나 잘 관찰을 했는지, 제가 어느날 너무 잘 먹어서, 저의 볼에 살이 찌는데 제 눈이 올라가드라구요. 그때 이 구절을 이해했습니다. 아삽의 관찰력이 뛰어나지만, 아직도 아삽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4.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시편 73:7b)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100만원을 벌어야 하는데 이 악인들에게는 1,000만원이 들어오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종종 저에게 이런 말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목사님 제가 돈 많이 벌어서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한 번도 그렇게 하시는 분을 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권면하는 것은 돈 없어도 좋으니 그냥 오셔서 예수님을 섬기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주님께 헌신을 드리고 돈을 벌어야지, 돈을 먼저 벌면 반드시 타락하게 되어있습니다. 물질적인 축복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이 바로 서기전에 먼저 임한 물질적인 축복은 반드시 인간을 타락시키게 됩니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시편 73:12)
악인들은 다 망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고 오히려 평안하고 재물이 더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삽이 시험에 들기 시작합니다.
5.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시편 73:13)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고도 잘 먹고 잘 사는데, 내가 예수님을 믿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신앙 생활은 바로 이러한 실존적인 갈등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시편 73:14)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으면 내 마음대로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인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합니다.
7. 이제 이러한 시험에 대한 아삽의 깨달음으로 들어갑니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시편 73:15)
이 말씀은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시편 73:13) 라고 말했더라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할 뻔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뜻은 마음으로는 불평했지만 그것을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 불평하고 있다면 나는 하나님께 “나는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나에게 불평되고, 어려운 일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면 그에 대한 불평은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는 불신앙이 됩니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삽의 고민이 등장합니다.
8.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시편 73:16)
아삽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아직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인생이 이렇게 불공평한가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왜 악인들은 저렇게 잘 사는데, 나는 고통을 받는가? 그 해답을 우리가 아직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삽은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마음이 심히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9. 신앙생활은 이러한 인생의 실존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냥 예배당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오면, 내 마음에 죄 지을뻔한 부조리한 인생의 실존적인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뒹구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인생이 불공평합니까?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잘 되는데, 왜 나는 이러한 일이 닥치는 것입니까? 나는 왜 이렇게 괴롭고,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10.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편 73:17)
이제 아삽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습니다. 성소에서 깨닫습니다. ‘성소’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자리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자리,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펼치는 그 때, 내가 하나님께 나가서 인생의 문제, 내게 닥친 환경과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뒹구는 그 장소가 바로 성소입니다. 아삽은 성소에서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11. 인생의 가장 커다란 궁극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문에 나타난 <결국>입니다. I understood their final destiny. 오늘 우리는 이 순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결국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아삽이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고 악인들의 오만함을 질투했지만 그가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날 때, 그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가 하나님께 경배할 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묵상하고, 기도할 때 인생의 문제가 풀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 악인들의 종말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12. 내가 처한 환경은 순간이요, 잠깐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결국’입니다. 아삽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그 결국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악인의 결국은 무엇일까?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할 정도로 전멸하였나이다 they destroyed, completely.” (시편 73:18-19)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시편 73:20)
이 말씀은 그들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우리가 인생의 ‘단면’을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결국’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13. 이제 아삽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시편 73:21-22) 내가 뭐를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인생에 대해서 참으로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에 대해 무지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우매하고 무지합니다. 지금 아삽이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기까지 나가면 이제 희망이 있습니다.
14. 인생의 한 단면을 보고, 지금 내가 처한 환경과 고난의 어려움 만을 보고 하나님을 판단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인생은 영원에 비하면 점도 안 되는데, 그 경험이 위대하면 얼마나 위대하겠습니까?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섭리와 인도하심, 작은 새 한 마리도 그냥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신 다는 믿음이 없기에 불평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고난 중에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영원하고 온전한 축복을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5.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시편 73:22-23)
내가 고통을 당하고 있을지라도 성경은 약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결단코 버리지 아니하고, 결단코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잘 먹고 잘사는 것보다, 지금 내가 고난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있어도 하나님이 나의 오른 손을 붙잡고 계심을 더 기뻐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6.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시편 73:24)
바로 이것이 인생의 결국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으셔서 그것으로 인도하시는 중입니다. 오늘 내가 고난 중에 있어도 하나님은 나의 오른 손을 붙잡고 계시며, 하나님의 교훈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결국에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17. 이제 아삽이 깨달은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시편 73:25-28은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신앙고백 중에 하나입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시편 73: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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