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미니스트리 <말씀을 걷다> 시편 90-100편
1. 미국은 긴급 구조 번호가 911입니다. 그런데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쌍둥이 빌딩과 버지니아에 있는 미국국방부 팬타곤이 비행기 테러를 당했습니다. 당시 저는 미국의 서부에 살고 있었는데 새벽기도를 마치고 아침 6시에(동부시간 9시) 자동차에 올라 라디오를 켰을 때, 뉴욕에 있던 110층의 세계무역센터 빌딩의 77층과 85층 사이로 비행기가 부딪혔다는 뉴스를 생중계로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침 9시 30분경에 펜타곤에도 비행기가 충돌했고, 바로 이어서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이 붕괴되고, 한시간 뒤에 북쪽 그리고 오후 5시경에 모든 건물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날 3,500명이 사망했고, 1조 3천억원의 세계무역센터 빌딩과 여파로 인한 피해액수가 52조원이었습니다.
그날 새벽기도에 펼쳤던 말씀이 공교롭게도 시편 91편이었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시편 91:1-2)
뉴욕 맨하탄에 있었던 월드트레이드센터(World Trade Center)는 쌍둥이 빌딩으로 불리우는 각각 415미터, 417미터인 두개의 빌딩입니다. 1973년에 개장한 이 빌딩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었습니다. 얼마전에 우리나라에 롯데월드빌딩이 세워졌는데, 그러한 빌딩 두개가 하루만에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 해 9월11일, 아침에 먹고 걸었던 시편 91편은 엄청난 크기의 실존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2. ‘은밀한 곳’은 히브리어로 ‘세테르’입니다. 그 뜻은 ‘비밀스러운 장소’입니다. ‘비밀’은 친밀함의 표시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과 비밀을 나누지 않습니다. 어려서 제일 친한 친구와 둘만이 아는 장소를 만들어 놓은 곳,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만이 아는 그런 비밀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지존자의 은밀한 곳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의 가장 깊은 비밀이 있는 곳입니다.
3.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에서 ‘거주’는 히브리어로 ‘야솨브’입니다. 이 거주(residence)의 상대되는 개념이 ‘방문’(visit)입니다. 성령님이 찾아오시는 것이 ‘방문’입니다. 우리가 보통 ‘어노인팅’, ‘임재’로 표현합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찾아오시면 각성이 일어나고, 깨달음이 오고, 은사가 나타납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임재하시면 부흥이 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러한 성령님의 역사로 큰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4. 그러나 부흥은 성령님이 오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주’(residence, habitation)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시면 은사가 부어지고 부흥이 임하지만, 성령님이 내주하시면 ‘성품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므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5.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는 독수리의 큰 날개로 새끼를 덮는 상태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새끼가 성장할 때까지 보호하시고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미합니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시편 91:4) 앞에서 은밀한 곳은 지성소의 상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날개 아래’에서 날개가 연상시키는 것는 법궤입니다. 지성소를 지키는 그룹의 날개가 법궤를 덮고 있습니다. 이 법궤는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으로 시은좌(은혜를 베푸는 자리)입니다. 이것을 그룹천사가 경호하고 있습니다.
6. 하나님의 성전에 거하는 자(residence)는 ‘성전된 성도’를 뜻합니다. 이 개념은 교회론의 매우 중요한 내용으로 참된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이 성전입니다. 거한다는 것은 예배자의 삶, 삶의 예배입니다. 또 삶의 예배는 ‘성품’의 예배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은사로 나타나며, 성령의 거주하심은 성품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성령의 성품에 지배되어야 합니다.
7.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시편 91:11-12)
이 말씀은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에 대한 두번째 시험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시편 91:11-12를 인용하며 천사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들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에서 내려 오시지 않고, 십자가를 그대로 지고 죽으셨습니다.
8. 능력은 그것이 어디에 무엇을 위해 쓰이는 가가 능력의 가치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뛰어내리셨을 때 천사들이 그의 발을 붙들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는 일은 놀랍고 신기한 일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흐리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신기한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9. 시편 91편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의 구체적인 모습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전능자의 그늘아래 사는 자(residence)는 사냥꾼의 올무에서,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십니다.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닥치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화와 재앙이 미치지 못합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천사들이 붙들어줍니다. 이 모든 것이 전능자의 그늘에서 성전된 성도가 누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인간의 명예와 자랑으로 드러내라고 한 것입니다.
10.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시편 91:1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안다는 말과 같습니다. ‘안다’(히브리어 ‘야다’)는 매우 경험적인 단어입니다. 온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것으로 ‘가장 친밀함’을 뜻합니다. 그가 나를 사랑한즉, 그가 내 이름을 안즉… 사랑, 앎은 가벼운 단어가 아니고 매우 ‘인격적’이고 ‘성품적’인 것입니다.
지존자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격이십니다. 눈물이 있고,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가 있고, 용서가 있는 인격앞에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적 통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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